| |
| |
| |
제5장 중국, 일본, 제3세계
-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계속해서 현대의 국제관계에서 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정세 전체를 워 싱턴 ㆍ 모스크바의 2차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세계 인구의 약 10분의 9는 소련과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점차 상호의존이 높아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이 10분의 9의 사람들이 미 ㆍ 소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양 초강대국으 로서도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 고 있는 일로부터 양국 관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답: 정확히 그렇다. 양 초강대국에 특별한 권리가 있다는 식의 생각은 언제나 소련과 거리가 먼 생각이었다. 우리는 여타 모든 국가들과의 관 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관계를 미 ㆍ 소관계 때문에 결코 무시하는 일이 없다.
- 그렇다면 소련의 외교정책과 미 ㆍ 소관계라는 양자와 관련해서 다 른 나라들 및 지역의 제문제를 언급하고 싶다. 그 하나는 중 ㆍ 소관 계의 문제이다. 서방측에서는 소련이 긴장완화정책을 채택한 것은 일차적으로 증공과 그의 군사력 증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의견 이다.
답: 그러한 의견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그것과는 실로 정반대로 소 련의 긴장완화정책 자체가 중공과의 관계악화의 한 이유가 되었다. 일
| |
| |
찌기 1950년대 후반에 서방측과의 긴장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소련의 의도에 대해서 중공은 퉁명스럽게도 낙인을 찍었다.
- 중 ㆍ 소관계가 악화한 이유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인가?
답: 그밖에는 없다. 소련이 발표한 서방측, 특히 미국과의 긴장완화 정책을 제쳐놓고 적어도 중공측에서 보면 다른 이유도 있다. 그 이유의 하나로서 우리가 중공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 점을 들고 싶다. 또한 중공은 사회주의국가와 세계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지도권을 주 장했다. 중공의 의도는, 스탈린 사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모택동은 소련이 이러한 중공의 주장에 있어서 중대한 장애라고 생각했다. 이점 은 매우 명백하다.
| |
1. 미 ㆍ 중 접근의 재해석
- 중공에 들어가는 것이 최근 워싱턴의 유행인데 이 점에 대해서.
답: 서방측, 그 중에서도 미국은 모택동의 반소주의에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중공과의 경제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고 중공에 군사원조를 제공 하면 중공은 자기의 동맹국이 되고, 그 결과 세계적인 힘의 균형에 급 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심리적으로는 장기간에 걸친 중공을 둘러싼 신화와도 어느 정도 관제 가 있을지 모른다. 리처드 닉슨의 이른바 ‘획기적인’ 극동여행 이후 워 싱턴이 도취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던 만큼, 이 신화에 특히 강한 자극 을 받았음은 거의 틀림없다. 이국정서와 미지의 것을 미화하는 것은 인 간의 약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동양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여 중공을 찾는 미국인에 대해 세제 최대의 민족을 둘러싼 어떤 신비성을 인상깊게 새겨넣었던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 고대 문화, 절묘한 요리, 서방과는 다른 인간의 가치관, 분명 이러한 것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미국의 방문객들을 거의 압도 적으로 매료시키고 호기심을 자아냈을 것이다.
정치적인 상투아리도 매우 다른 언어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면 무언가 숨은 의미와 매력과 지혜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 |
| |
것이다. 얼마나 교묘하게 북경의 지도자들은 백악관과 마의회와 월스트 리트의 요인들 사이에 새로이 타오르기 시작한 호기심을 키우고 격려했 던가?
그런데 중국은 언제나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 고 있었다. 미국이 태평양 세력으로 떠오른 이래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 과 사업가들이 중국에서 행운을 잡으려고 애썼는지 상기해보라.
- 중공에 대한 서방측의 새로운 태도의 리얼폴리틱(현실정치)의 측 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
힘의 균형은 이제 통용 안돼
답: 서방측과 중공 간에 관계가 없었던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주 장할 생각은 없다.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우리는 미국 등 서방제국이 중국의 신정권을 승인하고 중공의 유엔가입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서방측은 이를 회피했다. 그리 고 중공의 외교적 승인을 요구한 미국의 많은 중국학자와 외교관들은 매카시즘에 협박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과 서방측과의 화해는 모택동 지도부가 공격 적인 반소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화해가 우리의 우려를 블러일으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 그러나 서방측,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중공과의 관계를 개 선함으로써 소련에 대한 입장을 강화하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 을지도 모른다.
답: 당신은 상당히 솔직하고 단순한 형태로 이 정책의 개념적 기초, 즉 19세기적인 힘의 균형 게임을 표현했다. 이 게임의 본질은 저울의 자기편에 여분의 무게를 올려 놓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필연적인 일이 아닌가?
답: 그러한 정책이 필연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중대한 의문이 있 다. 적어도 핵무기에 의한 대량살륙을 방지하고 국제관계에 안정을 보 장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당연하다. 힘의 균형 게임이란 개념은 힘의 자유로운 사용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게임의 참가국들은 말할 것
| |
| |
도 없이 스스로의 책임 아래 힘을 행사하려고 하며, 이 경우 모조리 자 신이 세운 규칙만을 고려에 넣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그러 한 게임이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 그런 종류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메테르니히 (Metternich), 탈레랑 (Talleyrand), 캐슬러러 (Castlereagh) 의 신성한 망령들을 끌어내 어 이 세 사람이야말로 1815년의 비엔나회의에서 안정과 평화를 보장 하는 ‘힘의 균형’ 의 제원칙을 명문화했으며 나아가 이를 신성한 것으 로 만들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답: ‘힘의 균형’ 정책의 현대판 지지자들은 그 점, 당시와 현대가 유 사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왜 이 낡은 개념이 20세기 마지막 25년의 세계에는 통용될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여담이지만 당시에도 이 정책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평화 그 자 체가 이 정책의 목적도 아니었다. 주요한 목표는 현상유지를 꾀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매우 크게 변화하고 말았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19세기의 전반에는 오산 때문에 균형이 파 괴되는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유럽의 국경이 바뀌거나 왕조가 교체 되는 사태밖에 예상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그 규모가 한 정돼 있었으며 종종 원상으로 복구될 수가 있었다. 역사의 흐름이 결국 은 19새세기의 ‘현실정치가’ 를 억누르고 교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엔나회의협정이 유럽에 만족할 만한 안정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유럽문명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 었다.
오늘날에 있어서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초래하는 상황은 당시와 다 르며 균형게임의 참가국들이 적대하는 일국 내지 수개국을 파멸시킬 충 분한; 핵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첫 오산이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 는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정을 생각하는 것 은 넌센스이다. 최악의 경우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 더라도 그러한 현실과 유사한 세계에서 어느 한 나라가 실제로 전쟁 의 시련을 초래함이 없이 다른 나라에 적대하는 나라와 손을 잡음으로써 과 연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 |
| |
| |
긴장완화에 역행하는 ‘중공 카드’
- 소련과 중공 간의 일반적인 전쟁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우리는 그러한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으며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전 력을 다할 용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기를 원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는 협상할 수 있을 때는 언제라도 중공 과의 협상을 계속해왔다.
- 그러나 중공을 방문한 서방측 인사들은 누구나 돌아와서 모든 수 준의 중공 사람들로부터 소련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 고하고 있다.
답: 중국인은 과거 한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중공의 지도자들이 당시에도 그들이 말하는 만큼 소련의 침략을 진실로 두려워하거나 소련이 대중(對中)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실제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매우 의 심스럽다. 가령 서방 지정학자의 눈을 통해 이 문제를 본다 하더라도 소 련이 중공을 공격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어리석은 가정으로 보일 것이다.
-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가 언젠가 쓴 적이 있는데, 그는 중공이 좀 더 안정된 미 ㆍ 소관계의 형식에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답: 확실히 그는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 엇이었을까? 이 점을 기억해두기 바라는데, 소련을 협박하기 위해 중 공의 위협을 이용한다고 하는 모증의 환상을 품었던 것이, 미국이 1979, 80년에 긴장완화의 길에서 벗어나 위험스런 대결의 길로 접어들었던 중 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브르제진스키가 안정되고 정상적인 미 ㆍ 소관계 를 진심으로 찬성하고 있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양국 관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중공카드’ 를 사용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소련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안정을 의미했던 것이다. 증공 카드 - 트럼프 게임인 포커에서 유래되고 있는 이 용어의 배후에는 냉 소적이고 기만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접근방식이 은폐되어 있다 - 의 진 짜 의미는 긴장완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실제로 노리는 것은 중 ㆍ 소관계의 악화된 상태로부터 서방측이 당장의 이익을 얻자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미국 자신의 장기적인 이익마저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
| |
| |
다. 미국은 소련과 중공의 관계가 중대한 곤란에 빠져 있는 동안에 재 빨리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만 애쓰고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미국의 대(對)중공정책은 불안정한 정 세에 박차를 가해 긴장완화를 손상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의 정치정세를 악화시켰다.
- 그러나 모든 국제관계의 게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중공도 미 국카드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답: 그렇다. 중공도 미국카드를 사용했다. 그리고 내 판단으로 중공 은 미국이 ‘중공카드’ 를 사용하는 것보다도 게임을 더 잘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 미 ㆍ 중 무역은 배로 늘어났고 80년대에는 3배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답: 무역이 배로 늘어나거나 가령 3배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늘기 시작 한 출발점이 낮은 수준에 있음을 고려할 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공의 현대화계획에 대한 뉴스가 미국에 전해지고 정상적인 외교관계 가 수립되자 미국의 실업계는 환희작약하는 모습이었다. 중공에는 실로 홍수처럼 미국과 일본 둥 서방제국의 실업인 대표단이 밀어닥쳤다. 수 많은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방기업의 중역실에 좀더 냉 정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화계획이 대폭 축소됨에 따라 많은 계약이 중지되거 나 대량의 차관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공인 자신이 지금까지 보다 좀더 신중하게 장래를 생각하고 있다.
- 중공이 지금까지보다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하는 조 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광범위한 질문이지만 소련에 서는 중공 내부의 최근 변화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답: 중공의 국내정세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나는 중공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증공 전문가의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공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년 가까이 매우 곤란한 시기를 경험했다. ‘대약진’ 과 ‘문화혁명’ 은 중공의 경제를 저해했고 심각한 사회 ㆍ 정 치적,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으며 중국 공산당을 피폐시키고 그 방향을 그르쳤다. 이제 북경에서는 사회 ㆍ 경제개발을 둘러싸고 중공에서 지금
| |
| |
까지 무시되어온 많은 문제가 오로지 서방측과 그의 군사원조에만 배 타적으로 의존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이 고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소련 국민은 중공의 지도자들이 이런 사실을 통해 중공 국민에게 있어서 평화, 긴장완화, 인접국과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인 식하고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여 정책을 개발해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 중공이 서방으로부터 현대무기를 입수할 가능성에 대해서 소련의 태도는 어떤가?
답: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중공과 서방 간의 군사적 관계의 확대강 화는 반소(辰蘇)동맹을 지향하는 움직임이며 국제적인 안전보장에 있어 서 많은 위험을 내포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 |
레이건의 모순파 딜레마
- 레이건 정권하에서 미 ㆍ 중 화해에 새로운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래이건은 소련을 ‘봉쇄’ 하는 데 매우 열 심이었기 때문에 미 ㆍ 중 화해를 촉진하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답: 레이건 정권의 중공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모순되고 있다. 한편 으로 레이건 정권은 지금까지의 정권과 마찬가지로 중공이 소련에 대해 일종의 평형추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레이 건과 그 일파의 독단적인 반공주의가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중화인민 공화국은 변함없이 ‘적색 중국(red China)’ 이며, ‘자유중국(free China)’ 즉 미국이 수립하고 미국과 동맹하고 있는 대만과 병존하는 것이다.
중공을 둘러싼 미국 보수파의 전통적인 입장은 중공이 미국에 있어서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이 늘 그 특징이었다. 레이 클라인(전 CIA 부국장)과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등과 같은 사람들은 중공이 반소적인 언사의 댓가로 미국의 원조를 손에 넣더라도 행동의 자유를 보지하고 태평양지역과 ‘제 3 세계’ 에서는 자신의 국력의 증대를 이용하여 미국의 이익에 대항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들 보수파의 논리에 따르면 미국은 중공에 일정한 보증을 요구하고 좀더 압력을 넣어야 한다는 것아다. 동시에 보수파 인사들은 인도양에 있어서 미국의 군사적 존재가 증대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50만의 군대를
| |
| |
가진 대만을 점점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는 신뢰할 만한 동맹국 으로 간주하고 있다.
레이건 정권은 또한 열광적인 민족주의, 즉 미국의 이익을 좀더 완강 하고 노골적으로 촉진시키려고 하는 태도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렇 기 때문에 미국의 대(對)중공자세에는 증래의 아첨어린 수사가 사라지 고 그 대신 거의 명령적인 어조와 ‘중공은 달리 갈 곳이 없다’ 는 새로운 자신감이 들어선 것이다. 실제로 이와 똑같은 경향이 동방국을 대하는 레이건 정권의 자세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미 ㆍ 중관계가 어느 정도 냉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부터 장기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시기상조아다.
-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1982년 3월, 타시켄트에서의 연설을 통해 소 련이 어떤 전제조건도 붙임이 없이 중 ㆍ 소관계의 개선에 대해 협상 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답: 이웃나라인 중공과의 관계정상화는 소련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 한 목적의 하나였다. 우리는 조만간 이 목적이 실현되기를 희망해 왔으 며 계속 희망하고 있다. 브레즈네프는 당신이 언급한 같은 연설에서 소 련은 중공 지도자들의 정책, 특히 외교정책의 많은 점을 비판했으나 중 공의 내정문제에 간섭하거나 중공에 있어서 사회주의 질서의 존재를 부 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 ㆍ 소관계의 개선을 둘러싼 협상은,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아시 아와 전세계의 평화를 강화함에 있어서 장기에 걸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게 될지 모른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양국 관계가 개션되더라 도 제 3 국에 손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
2. 북방영토에 대하여
- 일본으로 화제를 옮겨보자. 소위 ‘북방영토’ 에 대한 일본의 요구 에 대해서 소련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답: 일본 정부는 제 2 차대전 후 얄타 ㆍ 포츠담 양 회담의 결정에 따라 소련 영토가 된 이들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자신
| |
| |
이 1951년의 센프란시스코강화회의에서 이들 섬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 을 인정했다.
우리는 이 문제는 법적인 입장에서나 실제적인 견지에서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즉 비록 당신네가 옳다 하더라도 현재와 미래를 통해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겨우 2,3개의 섬 문제를 왜 양보하지 않 는가 하는 점이다.
답: 이들 섬에 대해서는 단지 사소한 토지문제라고만은 생각하지 않 는다. 영토문제는 문제의 토지가 아무리 작더라도 특별히 신중하게 취 급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과거 이런 종류의 문제로 매우 자주 국제분쟁과 전쟁까지 야가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현존하는 국경의 승인과 불가침성을 현대 국제 관계의 규범 내지 긴장완화의 기본원칙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 비상한 노 력을 거듭해왔다. 이 원칙을 확립하는 일이 세계 평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또한 가령 아무리 작은 점에 대해서일지라도 이 규범을 면제하는 데 동의한다면, 끊임없는 재앙을 초래할 판도라 상 자를 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그밖에 수많은 해묵은 영토분 쟁이 재발하고 새로운 분쟁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국제적 안 전은 한층 더 손상받게 될 것이다.
나는 많은 일본인이 이 문제에 대해 품고 았는 기분과 감정을 잘 알 고 있으나 이 점은 일본의 정책이 인과응보의 벌을 받은 것이다. 왜냐 하면 이러한 감정이 생긴 것은 대부분 일본의 정책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 국민이 현재 이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격한 감정을 진정하고 이 문제가 일 ㆍ 소관계의 적극적인 발전의 장애가 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 |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 영토문제가 미결상태로 남는 한, 일본 주민이 그런 태도를 취할 용의를 가질 수 있을까?
| |
| |
답: 일본 국민이 언제 그러한 용의를 가질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제 는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 문제가 일 본의 이익에 있어서 어떤 심각한 중요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주요한 이익은 안전과 경제적 안녕에 있다. 이 두 가지의 이 익은 모두 북방영토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이익은 상당한 정도로 일 ㆍ 소관계의 전반적인 상황 에 좌우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장 중요한 이익을 확보하는 편이 2~3개 의 섬의 운명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전반적인 경제 정세, 점점 고갈되어가는 천연자원, 세계무역에 있어서의 곤란, 서방 제국에 있어서의 보호주의 물결 등을 고려에 넣는다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 일본 국민이 80년대에 당신이 말하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행동을 취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답: 그럴 것으로 희망한다.
- 그러나 지금의 정세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신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소련에 대한 적의가 점점 거세어져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소련 극동지역에 새로운 소련군과 중거리미사일이 출현한 데 대해서 도 일본 국민 일반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답: 그러한 감정이나, 일부 일본인이 군비경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일 ㆍ 소관계가 최근 악화된 진정한 원인은 북방영토 문제가 아니라 일본 을 미국의 노선에 추종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다. 이러한 압 력에 굴복했기 때문에 일본은 소련공산당 제26차 대회가 제안한 극동에 있어서의 신뢰양성조치에 대한 협상을 개시하자는 소련 제안을 거부했 다고 생각한다.
일본 국내에서도 내가 본 바로는 이러한 정책에 대해 점점 많은 의문 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일본인은 소련이 세계의 긴장격화를 배경으로 자국의 안전보장을 꾀하기 위해 적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소련의 미사일 배치도 미국과 중공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소련과 좀더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는 플 러스 요인이 80년대에 늘어날 것으로 절대로 확신하고 있다. 소련과 일
| |
| |
본은 전례없이 많은 공통의 이해로 묶여 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 념이다.
- 경제적 이해를 말하는가?
답: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안전보장면의 어해에 중점을 두고 싶다. 소련과 일본은 아시아 전역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군사대결의 수준을 낮 추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이 그 지리적인 위치와 높은 인구밀도 때문 에 매우 취약한 입장에 빠질 것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 약점은 군비 증강과 군사동맹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스스로의 안 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안전과 긴장완화를 강화하고 집단안 보 협력의 구조를 건설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1981년 말에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 때의 인상으로는 일본 국민 이, 동서긴장의 격화와 전반적인 군비경쟁이 그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무 엇을 의미하는지를 점차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희망하고 기대 해 마지 않는 것은 일본인이 평화와 긴장완화에 이처럼 중대한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원폭의 가공스러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국민으로 서 이 지구상와 평화, 안전, 협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가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경제면은 어떤가? 이것도 일본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이 세 계에서 경제가 평화와 국제적 안정에 일본만큼 좌우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물론 소련과의 협력강화와 분리할 수 없는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익도 있다.
- 일본은 현재 국민총생산(GNP)의 약 1%를 방위비로 사용하고 있 다. 일본이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논의에 대 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특히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해상교통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답: 그러한 논의는 군사력이 경제적 ㆍ 정치적 목적에 기여한다는 시대 착오적인 사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과거 일본은 영토확장과 군국주의에 의해서 세계에서의 경제적 입장 을 강화하려고 기도하다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그러나 일본이 지난 30 여 년 간 전쟁이나 침략행위에 호소하지 않고 이룩한 성과를 보라. 일본
| |
| |
이 이제 재무장하면 무엇을 얻는다는 말인가? 경제적 손상인가? 일본 의 경쟁 상대국의 보다 안락한 삶인가?
해상교통로의 방위론은 어떤가? 진정한 방위는 평화밖에 없다. 일 본은 제 2 차 세계대전중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 이들 교통로를 지킬 수 없었다. 일본이 현대의 세제에서 대해군을 건설함으로써 교통로를 지키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장난감배를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와 같은 짓이 나 다를 바 없다.
| |
미 ㆍ 일 ㆍ 유럽 3극 협력망
- 데이비드 록펠러 (전 체이스맨해턴은행 회장) 의 3극 위원회 (Trilateral-Commission) 는 일본 ㆍ 서유럽 ㆍ 미국 간의 긴밀한 협력망을 겨냥하고 있 다. 소련은 이 3각정책에 의해서 포위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지고 있는가?
답: 일본 ㆍ 서유럽 ㆍ 미국 간의 협력을 개선하려는 시도 자체가 소련에 그러한 감정을 야기시키지는 않는다. 그러한 협력강화가 이루어지는 정 치적인 배경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 협력관계가 긴장완화를 전체적인 배경으로 하여 발전하고, 제 3 세계와의 협력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제국 및 자본주의세계의 3각구조의 정점에 선 제국간의 혈력관계의 강 화와 더불어 나아간다면, 하등의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의 3대 중심간의 협력관계 증대가 냉전의 부활과 보조를 맞취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서방측이 현재 좋아하지 않는 성 책을 취하는 소련이나 기타 국가에 대한 군사적 압력의 증강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경제면에서의 협력이라는 것이 3극의 모든 나라들 이 미국이 주도하는 보이코트나 봉쇄 및 금수(禁輸)에 참가하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3 극관계에 단호히 반대한다.
- 분명히 일본경제는 팽창하고 있다. 일본이 전력을 다해서 중공시 장에 침투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사태발전인 것처럼 생각된다.
답: 일본이 중공시장을 획득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욕 망에는 깊은 역사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중공과의 무역의 한계에 대 해서는 이미 이야기했다.
무역은 자선이 아니며, 일본의 재계인사들이 그들의 상품을 거저 주
| |
| |
어버릴 상소를 찾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은 천연자원을 거의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중공으로부터 수입할 수 있게 되면 중 ㆍ 일 무역의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원료자원의 개발은 중공경제의 현상으로 볼 때 막대한 투자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계획은, 중공의 불안정한 국내정세를 생각하면적잖은 모험이다. 대체로 대중(對中)무역의 전망에 대해 일본 재계는 실망하는 기미가 엿보이고 있다.
- 1973년에 나는 당시의 다나까(田中) 수상과 만났다. 당시는 중공국민과의 우호도, 투자와 사업의 확대도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플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나는 오키 타 사부로(大來佐武郞) 전 외상을 만났다. 오키타는 경제전문가이며 일본의 로버트 맥나마라 (세계은행 전총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인물인데 최근 일본경제연구센 터 소장으로서 중공의 현 지도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을 방문, 재정 ㆍ 경제 문제에 대해서 조언했다. 오키타는 성급한 거래나 무역의 급진전 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답: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도취감에 젖어 있던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는 좀더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보아야 할 때이다.
- 3 극위원회의 일본측 위원장이며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 전총재인 와타나베 다카시 (渡邊武)로부터 일본인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볼 때 중국인에게 원래부터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소련의 대(對)일본 외교는 “서투른” 경우가 많다’ 고 부연하고 있었다.
답: 나로서는 와타나베가 말하는 ‘서툴다’ 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의 영토 요구에 양보하지 않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지만 양 보하는 편이 오히려 서툰 짓이라고 생각한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외교정책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많지만, 소련인과 일본인은 서로의 정책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건설적이고 상호 이익이 될 관계를 발전시 키는 방법에 대해 좀더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계야말로양국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이익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일 ㆍ 중 간에 원래부터 친밀감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두 나라가 몇
| |
| |
차례나 격전을 교환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 친근감이라는 것은 와타나베 와 다소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일 ㆍ 중 간의 충돌은 많은 경우일본인에게 책임이 있었으나 중국인에게 책임이 있었던 경우도 있다. 일본은 과거 ‘가미가제 (神風)’ 에게 구원받았다는 고사가 있다. 성스러운바람이 중국대륙으로부터 접근하는 중국 해군을 물리쳐버렸다는 것이다. 현대는 가미가제에 의존하기는 곤란하다.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현 명한 외교정책이다. 이러한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평화와 국제협력을 촉진하고 상호불신과 공포의 두꺼운 장벽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 |
3. 유럽은 하나가 될 것이다
- 이제 유럽으로 화제를 바꿔보자. 1936년에 이탈리아의 외교관 카를로 스포르차 (Carlo Sforza) 백작은 ‘유럽의 이상에 봉사하든가, 멸망 하든가 두 개의 길밖에 없다’ 고 쓰고 있다. 전유럽안보협력회의의 개최를 목적으로 한 소련의 구상은 소련 외교에 있어서 오랫동안 변함없는 테마였는데 아 구상을 제창한 것은 언제인가?
답: 이 회의의 개최를 처음 제안한 것은 1955년이었다. 이후 장기간 에 걸쳐 소련과 여타 사회주의 제국은 전유럽안보협력회의의 개최를 위해 한결같이 노력해왔다.
-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 (Johan Galtung) 교수는 일찌기 동서유럽의공생을 목적으로 유럽 전체를 그물눈과 같은 협력과 공동행동을 가능케 하는 거대한 정치적 ㆍ 경제적 조직으로 변화시키도록 제안한 적이 있다.
답: 실제로 그러한 구상은 갈퉁 교수의 독창이 아니다. 80년 전 이것은 ‘유럽합중국’ 이라고 불렸다. 이 구상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엄격히 비판했는데, 레닌은 당시의 상황에 서는 그러한 공생관계가 실현되지 못 하거나 반동적이 될 것이며,반동적인 공생의 경우에는 식민주의적 약탈의 제도를 강화하기 위해 단결한 제국주의 제국의 동맹으로 전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
| |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 통함
그렇다면 통합유럽에 대한 현재의 소련 입장은 어떤가?
딥: 그 경우의 통합이란 어느 정도의 통합을 가리키는가가 문제이다. 그런 종류의 통합유럽이 새로운 초대국이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공상적이타고 생각된다.
세계 일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경제통합에 유리한 객관적 경향이 발견되고 있다. 비록 우리는 이 과정에 여러가지 곤란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현존하는 불평등과 보다 부강한 국가들의 지배적 입장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과정이 가까운 장래에 유럽은 물론이고 서유럽 지역에서조차 어떠한 경제통합으로 귀결될 것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이 문제의 또 다른 비경제적 측면은 월씬 더 복잡하다. 특히 최근 매우 격렬한 형태로, 더구나 예상밖의 사건으로 분명히 표면화되고 있는 민족의식의 성장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바란다. 벌기에의 왈론인(the walloons),
영국의 스코틀랜드인과웨일즈인, 프랑스의 코르시카인의 경우가 그러하며, 북아일랜드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처럼 민족문제가 공공연한 무력분쟁의 특징을 띠어온 지역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유럽 제국이 그토록 주요한 상이한 성격을 극복하고 융합하여 하나의 초대국으로 되리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역사적 경향에 관한 것이지만 이런 증류의 통일계획에서 유래하는 정치적 계획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상당한 악의를 감추 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왜 그런가?
답: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계획이 자본주의하의 유럽만의 통일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두 개의 대립하는 군사 ㆍ 정치블럭으로 분열돼 있는 유럽의 현상(現狀)을 고정시키고 항구화하는 시도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소련의 입장은 잘 알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비정상적인 정세를 종식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두 개의 블럭 내지 적어도 그 군사기구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전 유럽의 통일을 염두에 둘 때 즉각 떠오르는 의문은 어떠한 입장에 입각해서 이를 실현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사회주의 제국은 자본주의가
| |
| |
될 계획은 없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서방에도 사회주의가 될 절박한 계획은 없다. 자신들의 제도를 상대방에 강요하려고 할 경우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 그렇다면 결국 앞으로 몇 년 간도 유럽은 분열된 채 존재하리라고 내다보는가?
답: 당신이 유럽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사회가 공존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적대적 관계와 긴장 이라는 통상적 의미에서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태 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블럭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소련은 군비관리와 군축을 촉진하고 한층 깊은 상호신뢰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치협력 을 점점 발전시켜 나가는 데 찬성한다. 또한 유럽지역의 경제 ㆍ 과학 ㆍ 기술협력 및 관광, 그밖의 다양한 종류의 접촉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지지한다. 우리는 유럽의 2개 지역이 사회경제제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안전과 협력, 그리고 원한다면 조화를 이루는 관계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 |
세계 최고의 무기집적 지대
- 정치개념의 용어로써 유럽의 안전보장의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
답: 우선 첫째로 이것은 이 지역의 국제관계의 전 체계에 매우 급격한 여파를 초래하는 문제이다. 유럽에서는 두 개의 상이한 사회경제제도에 속하고 있는 국가들이 서로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치하고 있다. 세계에서 이만큼 대량으로 치사무기가 축적돼 있는 지역은 없으며,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일촉즉발할 정도로 위험한 화약고가 되고 만 지역도 없다.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즉 평화공존과 협력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선명하게 제기되고 있 다. 어떤 의미에서 유럽은 현대의 가장 사활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의 실험장이 되고 있는 것이나.
- 나는 빌리 브란트와 회견했을 때 브란트가 자신의 등방정책은 완
| |
| |
전히 실패했다고도, 충분히 성공했다고도 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답: 인간의 노력으로 완전히 성공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전반적으로 볼 때 보란트의 동방정책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음은 틀림없다. 빌리 브란트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촉즉발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더구나 동서간의 분쟁이 지엽적인 특징이 아니라 중심적인 특징을 지닌이 지역에서 긴장완화를 개시하는 데 공헌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문제와 곤란을 보면, 유럽의 정치관계는 기대했던 만큼의 변확를 이룩하지 못했으며 그둥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절대 역전시킬 수 없을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방정책이 그 실현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던 유럽의 건설적인 변화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 이러한 건설척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한스 아델(Hans Apel) 전 국방상은 군비의 뒷받침이 없으면 동서간의 협상은 실제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말했다.
답: 서독의 국방상이 그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해서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록 그러한 의견은 군비경쟁에 기여하고 긴장을 부채질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 (동서간 협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군비이다.
우리는 과거 30년 간의 군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군비가 협상에 기여하거나 협정과 협력을 낳은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인류가 몇 세기 동안귀가 따갑게 들어온 문구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경구는 아무 효력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다.
- 1975년의 헬싱키 최종문서를 돌이켜보면 80년대 유럽의 모습은 실로 암담한 것처럼 보인다.
답: 물론 환상을 품어사는 안된다. 국제정세는 심각해졌고 80년대는 위험한 긴장격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 당신이 이 문제를 언급했기에 하는 말이지만 긴장완
| |
| |
화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곳은 분명이 유럽대륙이라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 실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이미 미국측에서는 상당한 초조감을 보이고 있다. 키신저는 미국의 새로운 냉전자세에 동조하기를 주저하는 유럽인들의 감정에 언급했을 때 이렇게 요약했다. ‘유럽인이 온건 주의를 독점하고 한편 미국이 압력을 독점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고.
답: 그렇다. 이러한 역할분담이 미국인에게 있어서 가장 좋다고 말할수는 없다. 우리도 믈론 서유럽과 미국이 압력이 아닌 온건주의, 대결 이 아닌 협력에 기초해서 소련과 관계를 가져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키신저는 이 점에서 유럽인들을 책망해서는 안된다. 미국과 유럽 간의 갈등의 근원은 미국정책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미국의 정책이 긴장완화로부터 긴장의 증대로 전환한 데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이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유럽인들이 미국인들보다 긴장완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
냉전부활에 저항하는 유럽
-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답: 무엇보다도 먼저 유럽인들이 전쟁의 위험에 대해 훨씬 민감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 찰즈 비어드가 말한 바와 같이 ‘유럽의 제문제에는 50세기 동안의 전쟁의 혈흔이 달라붙어 있다’
더구나 NATO 내부에서 그토록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련의 탱크와 신형 중거리미사일 SS 20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결국 미국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다.
유럽의 전쟁이 미국에게는 ‘국지’분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무대’ 는 워싱턴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기서 살 아가는 유럽인에게는 유일무이한 장소이다. 따라서 유럽인에게 있어서 는 미국인의 용어로 ‘국지’ 적인 이 전쟁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둘째로 서유럽인들은 긴장완화에 경제적으로 훨씬 더 큰 이해관계를
| |
| |
갖고 있다. 인간끼리의 접촉과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다는 감정, 동서를 불문하고 유럽의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유산도 있다. 또 한 강력한 역사적 유대도 많다. 히틀러에 대한 우리 공동의 싸움에는 미국도 참가했으나 이는 유럽인들을 특히 긴밀하게 결속시키는 경험이 었다.
서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소련인들은 프랑스, 벨기에, 그 밖에 많은 나라들의 저항운동에 참가해서 싸웠다. 프랑스 장교는 소련 의 공군에 참가해서 싸웠다. 소련군은 유럽의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유럽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나치를 타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소련 병사의 묘는 유럽대륙 곳곳에 홑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평화와 긴장완화에 대해서는 미국보다도 유럽이 훨씬 더 우선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서유럽이 미국인을 긴장완화에 사실상 끌어들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냉전부 활이라는 미국의 시도에 대해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수미일관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긴 하지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냉전의 유산이 모 든 유럽인들의 마음으로부터 깨끗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서유럽 에는 긴장완화를 두려워하고 동서간 분위기의 긴장격화를 바라는 세력 도 있다.
- 어떤 세력을 의미하는가?
답: 우선 그 중 하나로 서유럽 국가들에는 모두 군산복합체가 있는데 이들은 긴장완화에 대해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거의 동일한 태도를 취하 고 있다.
다음으로 자신들의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우려하고, 긴장완화를 이 불안정의 주요 이유로서 스케이프고트(희생양)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 다. 그들에게 동서간의 적의와 분극화가 부활한 상황은, 서유럽의 사회 변혁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길들이고, 또한 외부로부터의 위 협을 구실로 - 이러한 위협이 실재하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 국민 의 단결을 도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반공주의에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럽,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고 있는 나라들에서 반공주의는 미국과는 양상을
| |
| |
달리한다. 그러나 반공주의가 국제긴장격화의 중요한 원인으로 존재하 고 있음엔 변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제국(帝國)지향이라는 유럽의 전통적인 긴장요인 이 있다. 물른 그것은 40년 내지 70년 전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독일연 방공화국(서 독)에는 아직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일부 파워 엘리트를 포함해 서 독일인이 유럽과 세계 여타의 지역에서 또다시 패권을 다투어야 한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독일의 군사행등에 현제 다 양한 제약이 부과되고 있는 점에 분노하고 있다.
- 그렇다면 그러한 세력 이외의 유럽인들, 평화와 긴장완화를 바라 고 있는, 우려하는 유럽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답: 우려하는 러시아인과 우려하는 미국인이 해야 할 일과 같은 일이 다. 군사력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영속적인 평 화에는 긴장완화, 군비제한, 동서간의 좀더 폭넓은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무방비상태라고 일컬으면서 군비경쟁의 계속을 주장 하는 사람들이 유포하는 공포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억지력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유럽인도 향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럽의 전쟁이 세계전쟁, 나아가 핵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의 정치적 현실이다. 소련에서는 이 점이 잘 이 해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서방측에서도 이해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 그러나 유럽의 평화운동이 전례없이 고조되고 있는 점 자체가 이 러한 이해가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답: 그렇다. 이 운동은 수백만 명이라는 유럽인들의 성실하고 힘찬 민중적 심정에서 싹트고 자라왔다. 이 사람들은 평화는 물론 조국의 생 존을 도모함에 있어서 군비경쟁과 군사대결이라는 구래의 방법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이 모두 유럽, 즉 전쟁의 참화로 고통을 받았으며 아직까 지도 현대무기가 과잉 비축되어 있는 유럽대륙에서 일어나고 있음은 이 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등은 활력이 넘치고. 지속적이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 |
| |
사로잡고 있는 생각만큼 강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위관리들은 당초 서툴게도 이 운동을 소련의 선전에 의한 모략이라며 일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결국은 제네바에서의 협상을 개시함으로써 이 새로운 유럽의 분위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고 당장 자신들의 표현방식과 선전의 어조를 바꾸었다.
| |
등구의 사회주의 정착은 사실
- 그러나 1949년형의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오늘날에는 우스꽝 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소련의 군사행동, 가령 동유 럽의 위기에 대응하는 소련을 두려워하는 감정은 아직 남아 있다.
답: 사실이다. 현재의 NATO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방향으로 전개되 어 왔다. 일반 대중이 품고 있는 합리적인 의문을 억누르기 위해서 믿을 만한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NATO의 전문가믈이 최근에 만들어낸 이 작품을 신용할 만하다고 생각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점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들의 주장은 동유럽에 무언가 소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가령 소련이 공격해올 경우 서유럽을 방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무엇인가 합리성이 있다고 한다면, 서유럽은 동유럽의 사태에 많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가설에 기초할 경우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소련이 서방측에 적대적인 반응을 일으키리라고 예상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미국은 동유럽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자 하는 자신들 의 의도를 NATO가 옹호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 한 미국의 속셈은 도대체 서유럽,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의 참다운 이익 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서방측은 사회주의가 동유럽에 정착했다는 사 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 그 점과 관련해서 폴란드 정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폴란드에 있 어서 최근의 사태는 현재의 상황에 심각한 불만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 아닌가?
답: 물론 불만은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사회제도 전체에 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와는 관계없는 사항, 즉 오류와 경제적 곤란, 부
| |
| |
패, 특정 당국자들의 여타 범죄행위 등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밖의 요인도 포함돼 있다.
폴란드 사태의 초기부터 미국은 서방의 일부 써클과 더불어 전력을 다 해 이 사건을 중대한 국제적 위기로 전화시키려고 했다. 일부 ‘연대 (Solidarity)’ 지도자들과 그밖의 반대세력이 취한 과격한 태도가 외부로부터 주입된 확신,즉 소련 등 사회주의 제국은 물론이고 폴란드 정부에도 압력을 가함에 있어서 미국과 NATO로부터 완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폴란드가 곤란한 시기에 처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폴란드가 사회주의 하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감출 수 없다. 폴란드 는 현재의 곤란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 당신은 미국이 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국제긴장의 증대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ㆍㆍㆍㆍㆍㆍ
답: 그렇다. 긴장완화를 좋아하지 않고 긴장상태를 환영하는 정치가 들이 미국에 적지 않은 까닭은 긴장이 고삐를 바짝 조이고 자국민뿐만 아니라 동맹국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술의 효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효과가 있을 뿐이며, 단기적으로 보면 미국과 서유럽 의 관계에 표면적이든 은폐된 형태이든 다양한 긴장을 일으키고 증대시 키 는 한편 쌍방 간의 장기적인 문제도 악화시킨다고 막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있는 바이다.
| |
노스탤지어와 현실주의
- 새로운 냉전이 불순한 동기에 의한 것이라면 서방측에 진짜 단결을 가져올 수 없다는 뜻인가?
답: 그렇다. 세계는 1950년대 이후 변화했다. 미국의 노스탤지어 (향수) 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사실 미국은 아직 자신의 의사를 상대국에게 강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동맹국은 경 제적으로 훨씬 강력해지고 정치적으로도 미국에의 의존도가 적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에 넣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
| |
- 유럽의 평화운동이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은 잘 알고 있지만 많은 유럽인들이 파괴력을 간직한 사악한 화물을 운반하면서 음속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미사일과, 상상할 수 없는 위험을 둘러싼 끝없는 논의에 당황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 하고 있다.
답: 귀찮아하는 점은 설명이 가능하다. 오랫동안 논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생존여부가 달린 문제의 중요성을 일축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생존 문제에 대해 귀찮해서는 곤란하다. 좀더 일반적인 코멘트를 허용해준다면,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유럽중심주의 자(Eurocentrist)라는 그릇된 인상을 주기를 원치 않으나,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이 대륙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모두’ 란 말에는 대부분 조상의 뿌리를 유럽에 갖고 있는 미국인은 물론이고 우랄산맥의 이쪽뿐만 아니라 그 반대쪽에 살고 있는 소 련 시민도 포함되어 있다. 이 대륙을 지키고 그
장래의 존립을 위해서 공정한 조건을 확보하는 일이 극히 중요하다. 여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유럽인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 ㆍ 소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되어야 만다. 미국을 유럽으 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다. 유럽은 냉전의 온상이며 긴장완화의 발상지 이기도 했다.
유럽 문제는 단순히 대국이 무사(無私)의 정신으로 유럽인들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소련과 미국 쌍방에 있어서 자신이 살아남느냐 여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 당신의 견해로는 국제관계의 존재방식으로써 유럽외 가장 바람직 한 정세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가?
답: 영속적인 안전보장과 광범한 협력관계라고 생각한다. 이를 실현 하기 위해서는 유럽 대륙이 두개의 서로 대립하는 진영으로 나뉘어 강력한 핵무기와 재래식 무 기로 무장하고 수십 억이라는 돈을 군비로 낭비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종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쌍방의 군사블럭을 해체하든가, 우선 그 군사기구를 해체하는 데 찬성한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헌장에는 NATO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기구는 해산한다는 것을 규정한 특별조항이 있다.
| |
| |
- 그 목표의 실현에 노력하는 가운데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추방하려는 것은 아닌가?
답: 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현실주의자이며 실현할 수 없는 목표를 우리의 과제로 설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 지적한 적극적인 목표의 달성은 미국의 동의,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완 화와 군축과정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참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 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긴장완화, 안전보장, 협력을 바라고 있다. 미국, 서유럽, 소련 3자 간의 안정적인 관계 없이 국제관계의 안정된 제도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소련의 목표는 서유럽과의 좋은 관계, 미국과의 좋은 관계, 그밖의 모든 국가들과의 좋은 관계임을 거듭 확인해두고 싶다.
- 그러나 유럽에 있어서 소련의 외교정책 노선은 현재로서 상당히 반미적 (反美的) 이라고 보여지는데ㆍㆍㆍㆍㆍㆍ
답: 그것은 오늘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 초래한 직접적인 결 과이다. 미국의 반소(反蘇) 정책에 대한 우리의 반발이 일부 사람들에게 는 반미적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유럽 문제를 둘러싼 이 토의를 총괄한 다면 유럽은 결국 좁고 인구도 과다해서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모든 분 쟁과 대결의 여지가 없어져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
4. 아프리카, 중동, 라틴 아메리카
- 중공, 일본, 인도, 유럽이 미 ㆍ 소관계에 중요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거 5년 간에 걸친 긴장완화의 시련 및 곤란과 관련해 서 기억나는 것은 아프리카의 뿔인(the Horn) 앙골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물론 중동이다. 제 3 세계에서 점점 다이나먹하게 발전하는 사태는 미소 간에 어떤 화해를 실현하더라도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거꾸로 양초대국 간의 긴장의 증대가 발전도상국의 절박한 문제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답: 사실이다. 세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에 제대로 대
| |
| |
응하지 못하는 선진국도 있다. 그러나 발전도상국에 대한 정책과 관련해서 소련과 미국을 동렬에 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 3 세계의 기본적인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몇 세대 동안 세계의 이 지역들은 서방 자본주의의 식민지 내지는 반(半)식민지적인 뒷뜰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수억 명의 사람들이 겪는 비참한 상태에 책임있는 외부세력을 찾는다면, 그 책임은 실로 서방측에 있다.
- 그리고 러시아에도.
답: 러시아는 1917년에 식민지 그룹으로부터 탈퇴했다. 그 이전 러시아는 그 자체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 식민지는 용서없이탄압받고 착취당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지역의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 ㆍ 문화적 부활을 기도한 것이 우리 혁명의 주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 소련의 중앙아시아공화국이 1917년 이후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은분명하다. 적어도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답: 매우 짧은 기간에 이들 제민족은 중세의 후진성으로부터 현대문 명으로 이행했다. 이 점 못지않게 증요한 것은 그들의 민족적 유산이 보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화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식민지 제민족의 고난에 직접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범위에 관한 한 과오를 바로잡을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 |
제 3 세계의 민족주의
- 발전도상국에는 더이상 원조하지 않겠다는 얘기인가?
답: 아니, 그런 뜻은 아니다. 지금도 원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가능 한 한 원조할 계획이다. 그러나 또한 식민제국을 소유하고 착취하고 그 부와 자원을 횡령한 자들은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방 의 민간기업은 이들 나라로부터 초과이윤(superprofit)을 짜내기 위해 계속 투자하고 있다.
- 그러나 많은 발전도상국은 외국의 관민(官民)으로부터의 투자를 유치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답: 그렇다. 이들 나라에는 막대한 투자, 자본, 기술, 노우 하우, 숙 련노동력 둥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은 제 3 세
| |
| |
계에서 이용할 방대한 수단을 갖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조건으로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인가라는 점이다. 민간기업이 제 3 세계 국가들에 투자할 때의 주요 목적은 선진국에서는 노동비용이 높기 때문에 획득할 수 없는 고율의 이윤을 올리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발전도상국을 초과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이 이들 발전도상국과 서방 간의 분쟁의 불씨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 발전도상국의 다국적기업에 대한 태도도 나라에 따라 다른 것이 분명하다.
답: 그 점은 확실하다. 제 3 세계의 일부 정권은 다국적기업에 전면적 내지 거의 전면적으로 굴종하여 그 댓가를 얻는 대신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하고 있다. 그 결과는 대체로 동일하다. 즉 나라는 착취당할 대로 착취당하고, 민중의 불만은 고조되어 조만간 쿠데타가 일어나고, 혁명 이 일어나기도 한다. 새 정권은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종전보다 공정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거래에 대해 재협상 하는 것은 언제나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많은 경우 다국적기업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정부의 원조를 받아 새 정권의 안정을 손상시키거나 매수하려고 한다. 따라서
발전도상국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게 되며 그밖의 해결방법을 찾기에 이른다.
- 가령 소련에 접근한다든가 하는?
답: 많은 발전도상국에 있어서 소련과의 관계는 그 자체 유익할 뿐만 아니라, 서방측에 대항하는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이들 나라는 서방측과의 교섭력을 증대시키고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이전보다 좋은 조건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대신할 수 있는 제 도로서 소련과 여타 사회주의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지구상의 인구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아직 식민지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 다.
- 제 3 세계의 민족주의에 대한 접근 태도가 이처럼 경쟁적인 상태 에서도 긴장완화가 가능할 수 있을런지?
답: 우리가 제 3 세계에서 하고 있는 일 가운데 국제법과 유엔헌장, 유 엔의 결의 및 선언과 모순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더구나 서방측에서도 이제는 발전도상국과의 관계의 낡은 방식이 절망적일 정도로 시대착오
| |
| |
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국제사회로부터 거듭 인정돼 온 일이지만 발전도상국은 세계자원의 공평한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모든 선진국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 이 점이야말로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제 3 세계에 대한 소련의 정책은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것이 왜 긴장완화와 모순되어야 하는 것인지 나로 서는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제 3 세계를 동서 간의 권력투쟁 장소로 전화 시킬 수는 있지만 발전도상국의 제문제를 전세계적인 협력을 더욱 촉진 하는 자극제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후자의 접근방법을 선택하고 싶다.
| |
앙골라와 이디오피아
- 앙골라에 대해서는 어떤가?
답: 좋다. 이 나라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서방측이 지금 거의 망각하고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상기해 보도록 하자.
앙골라의 내부와 그 주변의 위기는 1975년에 불붙었다. 이 나라 최대 의 정치세력은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 이었다. MPLA는 60년대 초부터 포르투갈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쟁에 종사하고 있었다. 유엔총회는 일련의 결의를 채택, 식민주의와 투쟁하는 해방운동을 모든 방법으로 원조하도록 모든 나라들에게 호소하고 이 투쟁을 지지했다.
MPLA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여기서 그들은 소련에 요청해 왔다. 우리는 도덕적 ㆍ 정치적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한 물질적 원조를 제공했다. 이것은 모두 엄밀하게 유엔 결의 에 따라서 시행되었다. 사실 그밖의 나라들, 가령 스웨덴도 MPLA를 돕고 있었다.
1974년에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새로운 포르투갈정부는 앙골라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표명했다. MPLA는 대부분의 앙골라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이 신흥국가의 지도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았다.
| |
| |
그러나 미국, 중공, 남아프리카, 자이레는 앙골라 문제에 적극 개입, MPLA의 라이벌인 2개의 운동조직, 즉 앙골라민족해방전선 (FNLA)과 앙골라전면독립민족동맹 (UNITA)을 지원했다. CIA는 이 두 정치파벌에 돈과 무기를 쏟아부었으나 이 두 조직은 식민지시대에도 포르투갈 식민 지배자들보다도 오히려 MPLA와 싸우는 데 거의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군은 앙골라에 침입하였는데 한때는 거의 이 나라 수도에 까지 아르렀다. MPLA가 조직한 앙골라 정부는 외국의 침략에 직면해 서 소련, 쿠바, 아프리카의 수개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 원조는 실현 되었다. 쿠바는 몇 명의 군사요원도 파견했다. 그러나 서방의 예측과는 달리 앙골라는 소련의 식민지나 군사기지가 되지 않았다. 앙골라의 석 유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팬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걸프석유회사의 손으로 채굴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상기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
- 그러나 쿠바군은 아직도 주둔하고 있다.
답: 사실 쿠바는 그 요원들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킬 용의가 있고 앙골라 정부와 철수에 대해 두 차례나 합의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남아프리카공화국군과 앙골라 국내의 남아공 대리인인 분리주의자들로부터의 공격에 직면해서 철수를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침략의 위험이 제거되면 1982년 2월의 쿠바 - 앙골라 두 나라의 성명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쿠바의 군사요원은 철수할 것이다.
- 잘 알겠지만 서방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즉 앙골라는 긴장완화를 대신할 국제긴장의 새로운 시대를 예 고하는 전조라고 생각되고 있다.
답: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건 전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 그러면 이디오피아로 말머리를 돌리자.
답: 이디오피아에서도 이 나라에 대한 의국의 침략이 없었다면 소련 의 군사원조와 쿠바군의 존재는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정세는 비슷했다. 이디오피아에 전쟁을 도발한 것은 소말리아였다. 나 개인적으로는 소말리아가 미국과 그밖의 나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되지 않았더라면 이웃나라를 절대 침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
| |
| |
신하고 있다.
그런데 소련이 소말리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때에는 소말리아는 이디오피아 영토의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는커녕, 감히 이디오피아 문제에 개입하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만일 소말리아가 침략행위를 벌이기로 결정할 경우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구실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 더구나 이디오피아가 당시 아직 친(親)서구적 왕국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 다.
소련 둥 사회주의 제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아프리카 대륙 최고(最古)의 독립국가인 이디오피아는 아마 분할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일반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 그러나 왜 소말리아는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답: 왜냐하면 미국이 이 나라, 특히 인도양에 연한 베르베라(Berbera) 항의 전략적 지위를 높이 평가하고, 소말리아와 소련의 우호관계를 파괴시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그러나 베르베라항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소련이었다.
답: 그러한 계획이 있다고 비난받고 있던 바로 그 당시, 소련은 인도 양의 외국군사기지를 금지하는 협정을 미국과 협상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협상은 미국이 중단했고 베르베라는 지금 미국의 해군기지가 되었다.
- 쿠바 부수상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즈 (Carlos Raphael Rodriguez) 박사는 아바나의 집무실에서 쿠바정부가 아프리카에서 취한 조치에 대해서 그 동기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납득할 수 있었으나 미국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답: 물론 미국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미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이 앙골라에 침입하거나 이디오피아가 분할되는 편이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 이다.
나는 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쿠바의 원조가 국제법의 어떤 규범도 위 반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MPLA도 아디스 아바바의 혁명
| |
| |
평의회도 원조를 요구할 충분한 권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쿠바 국민이 이러한 긴급한 요청 에 응한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한 데 불과하다.
| |
라틴 아에리카에서의 미국의 강경노선
- 미국이 가장 반발한 것은 쿠바가 크레믈린의 대리인으로서 크레믈린의 이름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답: 쿠바는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타인의 선동으로 행동하거나 타인의 의사에 맹목적으로 따르려고 하지 않는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쿠바 의 행동을 지지한 것은 MPLA의 투쟁의 대의, 즉 남아공화국의 군사{problem} 입과 백인 용병과 CIA에 위협받고 있는 앙골라의 완전독립과 영토보전 의 투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 쿠바는 미국의 현관 앞에 있는 소련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을 끊임 없이 자극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다.
답: 그렇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이와 똑같이 미국이 받아들 이지 않으면 안될 일이 그밖에도 많이 있다. 미국의 주변에서는 점점 많은 나라들이 자주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왜 독립한 국가가 반드시 (미국에게) 자극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즈 박사와 회견했을 때 밝혀진 것은 미 국이 일단 봉쇄만 해제한다면 쿠바정부는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답: 그러한 정상화는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시기가 이미 오래 전에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정상화를 완전히 지지한다.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두어 가지 일반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니카라과를 초점으로 하여 라틴 아메리카에 새로운 일련의 혁명이 일어 나고 있는 현재, 앞으로 수년 동안 이 지역은 어떻{problem} 될 것으로 예상 하는가?
답: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은 아마 세계 여타 지역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지뢰를 발밑에 부설해 놓아 스스로의 정책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19세기 초에 먼로독트린을 선언한 이래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자
| |
| |
신의 식민지처럼 생각해 왔다.
그런데 별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먼로 대통령은 서반구에 있어서 미국의 패권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여타 지역에 대한 미국의 불 간섭도 맹세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만큼, 미국이 하고 싶은 대로 멋대 로 하는 지역은 없다. 여기서는 미국 기업의 착취가 가장 직접적이고 미국의 정치간섭은 극히 노골적이며 전반적인 접근방법이 가장 근시안 적이다.
- 그 한편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선전외교를 시도했고 존 F. 케네디는 〈진보를 위한 동맹〉을 발족시켰다.
답: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정책을 통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강경노선이 이 지역에서 불만과 저항과 급진주의를 낳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다. 미국이 주기적으로 비교적 개혁주의적인 융화책을 시도하고 부차적 인 문제에서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방법을 수정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 에 대한 미국 정책의 본질, 즉 라틴 아메리카를 신식민주의적인 착취 의 대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개혁은 언 제나 라틴 아메리카 주민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으며 결국 미국은 강경 노선으로 되돌아가 무력을 사용해서 친미 훈타(junta, 군사그룹)를 정권 에 앉히게 되는 것이다.
이 지역 전체에서 강경노선으로의 복귀가 목격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는 없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카리브해와 중미에서의 혁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1965년 ‘제 2 의 쿠바’ 를 저지하기 위해 엘살바도르에 군 사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그 결과 엘살바도르는 미 제국주의와 인권억압의 상징이 되고 있다.
CIA는 미국이 위험하다고 보는 이 지역의 정권에 대한 파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1979년 9월의 쿠바를 둘러싼 위기는, 쿠바에 대 한 협박의 새로운 캠페인을 적극 벌여, 미국의 군사적 존재를 강화하기 위해 교묘히 이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포클랜드 섬을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영국을 지지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 제국 민들에게 큰 채찍을 계속 휘두르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증명했다.
- 이 지역에 국제분규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
| |
답: 미국의 정책이 현재의 상태로 계속된다면 80년대와 90년대에는 서 반구에서 상당한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 역시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만큼 전쟁의 위험이 임박했던 적은 없었다.
답: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혼란이 증대되어가고 있다고 해서 라틴 아메리카가 반드시 국제관계의 위험지대, 즉 동서나 미 ㆍ 소 군사대결의 무대가 될 필요는 없다.
| |
‘불안정한 호상(强狀)지대’ ‘중동의 매듭’
- 아프리카로 되돌아가서 앙골라와 이디오피아에 원조를 제공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은가?
답: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쿠바도 우리 자신도 좋아서 원조를 제공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이 두 나라에 원조를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두 나라 사태 의 진전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오늘날에는 미국인 가운데서도 아프리카 해방의 대의에 공감하고, 이 원조가 아프리카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가령 앙골라와 이디오피아에 대한 원조는 짐바브웨의 평화적인 해결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 카 해방운동이 무력하지 않다는 점을 서방측이 깨닫지 못했다면 짐바브웨가 1980년까지 해방되었을지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방측은 몇 십 년 동안이나 식민지 철폐의 대의에 대해서 위선과 입에 발린 호의로 시종해왔다. 서방측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강력한 수단이 효과적이다.
- 설사 소련과 쿠바의 원조가 아프리카 제국민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소련의 의도를 의심케 하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비난하는 새로운 구실을 만들어내었다는 점만으로도 긴장완화를 손상 시켰다.
답: 앙골라와 이디오피아에 대한 원조는 사실 그러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긴장완화가 충분히 강력하다면 앙골라와 이디오피아가 직면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사원조가 요
| |
| |
구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긴장완화가 좀더 심화되고 잘 발전한 상태였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으리라고 보는가?
답: 1974~75년의 미 ㆍ 소 간에 좀더 신뢰관계가 존재하고 인도양의 군사기지와 외국군의 존재를 둘러싼 문제가 평화적인 협정에 의해 규제되어 그 중요성이 없어질 상태였더라면, 미국은 소말리아에 그릇된 환상을 품게 하는 짓을 삼가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소말리아를 억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분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앙골라에서도 많은 문제가 협의와 협상에 의해 해결되었을 것이다.
긴장이 완화되었다고 해서 과거 식민지의 제국민들이 필요한 경우엔 무력투쟁을 통해서라도 해방을 위해 투쟁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긴장완화, 평온한 국제환경, 제국 간의 신뢰관제의 강화는 해방투쟁이 국제분쟁과 심지어 대국 간의 대결로 발전하는 사태를 방지 하는 데 기여한다.
- 짐바브웨의 해방이 역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중동, 페르시아만, 서남아시아의 사태발전으로 빛을 잃은 것도 확실하다. 최근 2, 3년간 모든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브르제진스키가 일컫는 ‘불안정한 호상(孤狀)지대 (the arc of instability)’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답: 소련에서는 이들 문제를 논의할 때 ‘중동의 매듭(the Middle East Knot)’ 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한다. 확실히 이 지역의 다양한 문제는 서로 뒤얽히고 묶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복잡하며 수많은 대립적인 이해 가 경합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세계평화에 있어서 위험의 근원을 제거 하고자 한다면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한 일이지만 과거 수년간의 경향은 전혀 반대였다. 새로운 문제 가 나타나 사태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일촉즉발의 정세가 되었다. 미국이 중동의 석유에 점점 의존하게끔 된 데 대한 대응방식도 그러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 내에 이 러한 새로운 정세에 수반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능력에 대한 환상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 |
| |
- 중동 문제에서는 캠프 데이비드 방식에 반대하고 있는 듯한데ㆍㆍㆍㆍㆍㆍ
답: 우리의 견해로 이 방식은 이 지역의 포괄적인 평화해결에의 길로부터 일탈하는 위험한 접근방식이며, 중동에 있어서 미국의 패권을 다시 추구하려는 것으로서, 중심과제의 하나인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의 자결 권을 희피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미국이 과거의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소련, 미국 여타 모든 나라의 협력이 이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가결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협력은 양대국뿐만 아니라 섬유수입국과 수출국,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양 인민을 포함한 여타 모든 중동 제국의 이익과도 합치된다고 생각한다.
캠프 데이비드 합의 자체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 방식을 뒷받침한 사고는 분명 여타 제국이 이 단독거래를 지지하면 미국이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것이다. 한편 여타 제국이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제네바회의나 어느 곳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서도 미국 ㆍ 이스라엘 ㆍ 이집트 ㆍ 이란 추 축(樞軸)은 미국의 이익을 도모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 |
일촉즉발 지역의 긴장관리
- 그후 이란이 이 게임에서 떨어져 나갔다.
답: 그렇다.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요르단 등 아람 보수정권이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지지할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가고 말았다. 거래는 곳곳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 점을 보아도 왜 미국이 온갖 구실을 붙여 중동, 페르시아만, 인도양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려고 하는지를 이 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지역의 미국의 정책이 대대적으로 군사화 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 미국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는 데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답: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 왜 그런가?
답: 그러한 방식의 한계를 어느 중동 지도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석 유는 탄다’고. 미국이 이러한 침략적인 정책을 취한다면 자신들이 추구
| |
| |
하고 있는 패권을 장악하기 전에, 그러한 정책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긴 장과 분쟁으로 세계 경제에 대한 에너지 공급이 중지되고 마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 ‘석유는 탄다’는 이란 ㆍ 이라크 전쟁의 비명 (碑名)이 될 수 있겠다.
답: 에너지 문제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 전쟁은 그밖에도 많은 점을 경고했다. 우선 첫째로 이 지역의 전반적인 불안정으로부터 빚 어지는 위험, 그리고 중대한 위기로 에스컬레이트할 수 있는 새로운 분 쟁의 발발 가능성이다. 특히 역내에는 낡은 분쟁의 겟더미에서 아직도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중동에서 최근에 발생한 대사건인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은 이 지역 의 정세에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첨가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한층 더 고립되는 한편 PLO에 대한 국제적 동정이 증대되었다. 동시에 레바논 의 비극, 전쟁의 잔학성, 이스라엘과 미국이 수행한 역할은 보수적인 아람 제국의 입장에 충격을 주었다. 모로코의 페즈에서 열린 정상회의 는 이 문제에 대한 아람 공동의 접근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마국과 이스라엘 자체에서 중동문제를 생각 하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베긴 수상과 샤론 국방상(레바논 침입 당시)이 일으킨 레바논의 유혈참사는 중동 위기의 핵심적 현실에 대해 이스라엘과 미국 두 나라 국민 대다수의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 소련과 이스라엘 양국 간에 외교관계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소련에 관계회복의 의사는 있는가?
답: 소련과 이스라엘 양국 간의 외교관계는 1967년의 6일전쟁 (제 3 차 중등전쟁) 중에 단절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침략과 점령영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한 조치였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중동의 위기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유명한 결의에 기초해서 해결하면 회복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 국가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뜻인가?
답: 그렇다. 우리는 되풀이 발표한 공식성명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권리를 포함해서 이 지역의 모든 국가의 생존 및 안전의 권리를 보장하
| |
| |
는 것이 중동 위기의 어떠한 해결에 있어서도 불가결하고 절대 필요한 부분이라는 태도를 분명히 밝혀왔다.
- 서방에서는 테러에 대한 소련의 태도에 대해, 특히 중동 정세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억측을 하고 있다.
답: 우리는 테러에 반대한다.
- 그러나 소련은 아라파트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테러는 종 종 PLO와 결부되어 있다.
답: 우리는 늘 팔레스티나 사람들과 그들의 투쟁을 지지해왔다. 그렇 다고해서 절망에 쫓기는 모든 과격주의 분파의 수단과 행동 전부를 인 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야세르 아라파트에 대해서는 팔레스티나인의 가장 탁월한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견해는 일부 서방지도자들을 포함해 서 점점 더 많은 세계 정치가들이 지지하고 있다. 가장 노골적인 형태 의 테러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베긴 자신이 한때 적극적인 테러리스트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서방세계가 이런 사실 때문에 그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소련은 중동에 소위 ‘평화도 전쟁도 아닌’ 정세를 온존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답: 우리는 세계의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이 지역의 긴장완화에 찬성 이다. 설사 ‘관리된 긴장’ 상태 - ‘평화도 전쟁도 아닌’ 이라는 어귀가 통상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것인데 - 가 우리의 이익에 합치된다 하더라도 거기에 찬성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긴장상태라는 것은 중동과 같이 일촉즉발의 지역에서는 무 기한으로 관리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 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정책은 전쟁을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 다. 실제, 캠프 데이비드의 정책은 그 의도는 어떻든 간에 그러한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
- 최근 아시아에서 회교 정통파가 부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사회 ㆍ 정치 분야의 독립세력으로서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싶지 않다. 회교가 활발해진 것은 아시아의 사회적 긴
| |
| |
장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회교 세계’ 라 는 것은 ‘기독교 세계’ 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 한다.
아시아의 다양한 사회집단과 국가는 다양한, 때로는 상호 배타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슬로건을 이용하고 있다. 아시아의 광범한 대중이 적극적인 정치활등을 자각한 결과 회교의 새로운 내용이 수용되었음은 확실한데 이것은 회교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 |
5. 왜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했는가
-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소련이 왜, 특히 회교권의 제 3 세 계 국가들의 호의를 그토록 희생하면서까지 현정권을 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했는지 서방측은 어리둥절하고 있다.
답: 당신이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또다시 제기했으므로 나는 일반적인 논평을 하고 싶다. 나는 미국이나 여타 서방 독자들을 설득해서 아프가니스탄 정세에 관련한 문제에 대한 소련의 견해에 동의케 할 수 있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I978년의 4월혁명을 지지하거나, 바브라크 카 르말(Babrak Karmal, 혁명평의회 의장)의 편을 들거나, 또는 카불 정부에 군사원조를 제공한 소련의 결정을 지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문제는 단지 관련 사실을 아는 것뿐 아니 라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정보뿐만 아니라 계급,
이데올로기적 ㆍ 정치적 공감,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답: 이러한 논의는 미국인이나 여타 서방의 독자들이 소련의 견해에 대해서 좀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방측 에서는 실제의 정세를 왜곡하는 소문이 수없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
| |
| |
요청을 받고 조약에 입각해서
- 그렇다면 왜 소련은 그토록 많은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개입을 했는가?
답: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상호관련이 있는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즉 아프가니스탄에 혁명 후 수립된 정부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일을 돕는 것,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남부 국경에 접한 반소(反蘇)기지가 되는 것을 막는 일, 이 두 가지이다.
군대를 파견한 것은 카불 정부로부터 거듭된 요청을 받은 후이다. 더 구나 중요한 법률적 측면이 있다. 즉 이 원조는 1978년에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기초해서 제공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영구히 머무를 생각은 없으며 이 나라를 여타 국가에 적대적인 행동을 일으키거나 위협을 가하기 위한 발판과 같은 존재로 바꿀 생각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부대의 주둔이 필요하게 된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부대는 철수될 것이다.
- 소련이 부대를 파견한 목적은 혁명정권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당신 은 말했다. 그러나 정권을 이끌고 있던 하피줄라 아민 (Hafizullah Amin, 당시의 혁명평의회 의장)은 소련군의 도착 직후에 피살되었고 그 대신 들 어선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민을 비난하고 갑자기 카불의 정책을 변경 하고 말았다. 이는 이상스럽고 모순적인 일로 보인다.
답: 우리가 혁명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혁명이란 것은 매우 복잡한 역사적 사건이며 급속히 변화하고 예상하지 못한 급선회를 하는 것이다. 세력 간의 균형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사람 들은 하룻밤 사이에 적과 아군으로 뒤바뀐다.
1978년 4월에 시작된 아프가니스탄혁명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 기했다. 혁명 직후 수립되어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 (Noor Muhammad Taraki)가 지도한 정부는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바브라크 카르말은 그 밖의 최고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하피줄라 아민도 정상에 가까운 지 위에 있었다. 혁명정부는 토지개혁, 소수민족을 위한 개발계획, 여성의 권리, 교육 등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사회개혁계획에 착수했다.
- 이러한 정책은 저항에 부딪혔다. 왜 그랬는가?
답: 그것은 1978년에 지위를 잃은 구지배계급, 즉 농민에게 토지를 되
| |
| |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4만 명의 봉건대지주의 이익에 어긋났기 때문 이다. 혁명 전에는 토지 전체의 70%가 이 지주들의 소유였다.
어떤 혁명에서든 상당히 전형적인 일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고 한다. 특권을 상실한 이러한 그룹이 아프가니스탄 반혁명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그처럼 위험한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어떤 혁명에도 모종의 반대는 불가피하게 수반되지만, 신정부의 정책에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시키는 점이 없다면 정부에 대해 중대한 위협으로 발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답: 신정부가 범한 과오는 있었다. 가장 큰 과오는 너무나 많은 일을 너무 빨리 성취하려고 한 점,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빌면, 전형적인 좌익편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회교 승려와의 관계라는 면에서도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대 부분의 승려는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혔으며 폐쇄당한 사원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하피줄라 아민과 그의 그룰이 상황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 앞에서 당신은 그를 아프가니스탄 정부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고 불렀는데ㆍㆍㆍㆍㆍㆍ
답: 그렇다. 바브라크 카르말은 이러한 오류를 방지하고 좀더 현실적 인 은건하고 민주적인 방법을 채택할 것을 촉구했으나 카르말이 대표하는 지도층의 일부는 많은 경우, 음모에 의해서 국외로 추방되든가 체포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아민이 강경노선을 추진하기가 용이해져 폭력, 억압, 테러의 정책을 강행했다.
사실 인민의 개성이 아프가니스탄 혁명의 곤란과 큰 관계가 있다. 그 는 권력에 굶주린 음모가, 파렴치한 술책가이며 혁명의 격동을 이용해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독재자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그러한 인물 은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1979년 9월 인민은 쿠데타를 일으켜 타라키 의장을 살해했다. 후에 그는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문책당했다.
| |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을 위해
- 소련이 아민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왜 소련의 원조를 요구한 아민
| |
| |
의 요청에 응했는가?
답: 소련의 원조는 아민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혁 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 그것은 오히려 꽁무니를 빼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아민은 그 특수한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이지 않았던가?
답: 아민은 지도자의 지위를 강탈했다. 그러나 아민의 탄압과 음모에 도 불구하고 아민의 정책에 반항하고 1978년 4월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 사람들이 당에 많이 있었으며 정부에도 몇 명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아민을 권좌로부터 축출한 것은 아민 일파 가 구금돼 있던 혁명지도자 다수를 처형할 계획을 실시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 그러나 소련은 왜 카르말 추방과 아민의 범죄를 허용했는가?
답: ‘허용했다’란 무슨 뜻인가?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원조하고 조언했지만 아프가니스탄 혁명의 추진방법을 지시할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혁명은 소련이 통제할 수도 없었거니와 실제 통제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지적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 에게 몇 차례 주의하고 조언했으나 그들의 혁명이었던 까닭에 결정을 내리는 것 또한 그들이었다.
- 바브라크 카르말 정권은 혁명정부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는가?
답: 그들은 정부의 정책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신속하게 행 동했다. 아민 정부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1만5천 명을 석방하고 탄압 행 위의 책임자를 처벌했으며 국외로 도망한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선언했다.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고 건전한 경제정책을 채택했다.
외교 문제에서는 인접국, 특히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 하 고 있다. 이 지역의 정치해결의 열쇠는 파키스탄 영내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적대적인 테러활동의 기지를 폐쇄하고 무장집단의 국경통과를 금 지하는 데 합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소련군을 본국으로 철수시킬 것이다.
- 여기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한 또다른 동기가 문제
| |
| |
가 된다. 아프가니스탄 혁명이 가령 실패한다면 소련에 있어서 위험 하다고 모스크바는 생각하고 있는가?
답: 그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공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혁명을 실패시키려고 왜 그토록 열 심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미 ㆍ 중 양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에 대한 적 대행동의 기지로 전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소련의 국경선은 약 2천5백 km에 달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매우 평온하고 우호적인 국경이었다.
- 소련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더라면 아프가니스탄은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답: 군을 파견한다는 결정이 소련으로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든가, 이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예상되는 모든 부정적인 반작용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소련 정부가 얻은 결론은 원조를 제공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 정부 가 혁명을 구하고 외국으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으며 이 지역의 이후의 사태 진전에 따라서는 소련의 안전보장도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자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태는 반혁명의 승리를 의미했을 것이며 여기에 수반하는 테러와 유혈은 피할 수 없고 반동 세력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을 것이다.
| |
이란을 대신할 미군기지
- 구체적으로 소련의 안전보장에 있어서 어떤 위협을 예상했는가?
답: 아프가니스탄은 반소(反蘇) 거점이 되어 중공과 미국은 어쩌면 소련 국경에 군사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 거점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 군사기지라고?
답: 그렇다. 과거 이란에는 미국의 군사기지가 있었으나 미국은 지금 이 지역 일대에서 이를 대신할 기지를 모색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라고 안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한 동기에 대해서 서방측에서 널리 유포되고 있는 견해로는, 소련이 부동항과 중동 석유에 대한 직
| |
| |
접적인 접근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답: 그것은 군사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잠꼬대 같은 말이다. 페르시아만이나 인도양은 이미 소련에게는 충분히 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령 소련이 좀더 이 지역에 접근하기로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험 한 지형을 가진 아프가니스탄을 발진기지로서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친구의 말을 빌리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캘리포니아주 사람들이 오레곤주를 공격하기 위해 네바다주를 통해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방측이 주장하고 있듯이 소련이 따뜻한 바 다를 목표로 해서 진출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제 3차세계대전을 야기 시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선전과는 어긋나지만, 소련의 탱크 와 병사들이 페르시아만 둥의 따뜻한 해변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정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답: 우리는 정치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정상 화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제안을 완전히 지지한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관계정상화에 대해 인접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
1981년에 우리는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세의 국제적 측면과 더불어 좀 더 폭넓은 페르시아만 지대의 평화와 안전보장에 대해서도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따라서 평화해결의 길은 열려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접국과 미국이 건설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소련군의 철수를 포함한 해결이 가능 하다고 확신한다. 아프가니스탄은 비동맹국으로 머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 적대적인 국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러한 우려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 서방측의 견해로는 소련은 카불에 전투적인 회교정권이 출현하면 이것이 방아쇠가 되어 소비에트중앙아시아의 희교도들 사이에 골치 아픈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ㆍㆍㆍㆍㆍㆍ
답: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가난하고 문맹이고 후진적인 아프가니스탄과 소비에트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과 소련의 여타 과거 회교지역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이들 지역은 번영하고 자신을 갖고 있으며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 반혁명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앉히려고 하
| |
| |
는 반계몽적인 억압적 신정 (神政)국가가 소련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인도전올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올 누가 진지하게 맏을 수 있올 것안가?
나는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소련최고회의에 선출되었지만 이 공화 국은 다수의 회교도 인구를 안고 있다. 나는 또 수년간 이 공화국의 한 선거구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해서, 회교가 소련에서는 정치문제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알라신을 믿는 사 함들이 기도를 하는 것은 자유이다. 회교 사원도 있고 회교 승려들은 존경을 받고 있다.
-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소련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프가니스탄 정 세에 서방측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 오판했다고 생각하지 않 는가?
답: 다른 나라들이 어느 특정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예촉하 기는 절대 불가능하다. 유쾌한 놀라움이 있으면 불쾌한 놀라움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정세를 올바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말한 대로 우리는 미국의 정책이 변화했다는 천제에서 행동했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건이 얼어나기 전이다. 미국과 여타 일부 서방 국가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사건을 반소 캠페인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을 모스크바는 예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가 시작한 이 캠페인은 이상한 과잉반응이며 미국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잉반응은 카터 정권이 이란과 중동 둥에서 서면하고 있던 곤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세와 관련해서, 아프가니스탄의 사건은 미국을 회교세계에 도움이 되는 세력으로 인식시킬 절호의 기회 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 의 반응은 어느 정도는 정권의 일부 인사들이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던 감정의 폭발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 |
제 3 세계와 긴장완화
- 제 3 세계의 사건이 어 떻게 미 ㆍ 소판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일 반적인 문제로 되돌아가서 제 3 세계에서의 충돌이 긴장완화를 손상시
| |
| |
키는 최대의 요인이라는 이야기를 서방측에서는 점점 자주 듣게 된다.
답: 그것은 폭넓게 유포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중대한 의문 이 있다. 이러한 견해가 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 이 매우 중요하다.
그 첫째 이유는 강대국들이 오래 전부터 자신들간의 직접적인 대결은 매우 위험하며 심지어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이라고 생각 한다. 따라서 강대국은 그들간의 관계의 중심문제에서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있으며,이 때문에 위험의 최대요인은 제 3 세계라는 인상 이 빚어지고 있다.
둘째로,제 3 세계의 정세가 변화무쌍하다는 점이다.
세째로, 일부 강대국 - 여기서 유감스럽게도 역시 미국을 지명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전략적인 고려에서 제 3 세계에 이상한 관심을 보이 고 있다는 점이다. 서방측은 소련이나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제 3 세계에 군사기지와 그 보호에 만전을 기한 통신망을 갖기를 원한다.
네째로, 발전도상국은 원료, 특히 석유의 공급원으로서 미국과 그 동 맹국에게 있어서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 요컨대, 제 3 세계가 이제 위험의 최대요인임을 인정한다는 얘긴가?
답: 그렇지는 않다. 발전도상국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들 제국의 사태가 어떻게 진전할 것인지, 특히 분쟁이 심각 해질 것인지 아닌지, 그것이 세계정세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여부는 미 ㆍ 소관계를 포함한 국제관계의 양상에 좌우되는 정도가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가령 1973년 10월의 옴 키푸르(Yom Kippur)전쟁 (제 4 차 중동전쟁)을 생 각해보기 바란다. 긴장완화의 범위 내에서는 이 전쟁을 국지화시키고 이 지역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한 기본적인 구조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전쟁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같은 긴장상태 가운데에서 일어났 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따라서 내가 회고록 지 말한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당신의 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동서 관계,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제국 간의 관계와 미 ㆍ
| |
| |
소관계에 좌우되는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만약 이들 관계가 새로운 냉전에 의해 지배 당한다면 제 3 세계는 그 가장 위 험한 무대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긴장완화의 사고가 우세해진다면 제 3 세계는 모든 경 제적 선진국간의 주요한 협력의 무대가 될지 모른다. 선진제국은 서로 협력하고, 매사에 대해 제 3 세계 제국인의 이익과 원망을 충분히 고려 하는 가운데 제 3 세계의 개발을 촉진하거나 그 다양한 지역에서 효과적 인 안전보장제도를 구축하거나 현명한 방식으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 세계의 제국민은 서방측을 위해서도 아니고 동방측을 위해서도 아닌,스스로의 역사를 창조할 것이다. 이들 제국민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고 스스로를 위해서 발전할 것이다. 지구상의 인구 가운데 대다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 사람들도 유럽인이나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자기실현을 위한 권리와 기회를 주장할 자격이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 면 그들은 이것을 알고 있고 좀더 나은 생활을 목표로 투쟁할 것을 결 의하고 있다.
-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제 3 세계에서 초강대국의 행동을 규제할 일정한 규칙,경우에 따라서는 위기관리 기구와 같은 것을 만들지 않으면 긴장완화가 진전될 희망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답: 양국이 협력해서 위기의 해결과 방지에 임한다는 생각은 맨 초기부터 긴장완화의 정책에 포함돼 있었다. 중동에서는 가령, 제네바회의 라는 형태로 위기관리기구와 같은 것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 접근양식 이 포기된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같은 생각은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1980년 12월과 1981년 2월에 제안한 페르시아만 지대의 비무장화를 둘러싼 광범위한 구상에도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소련제안은 군사력의 행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초강대국이 세계의 경찰관 노릇을 맡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긴장완화는 위기를 부채질하는 수많은 가연성 물질을 제거시킬 것이며 위 기를 관리하고 방지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또한 긴장완화 그 자체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 현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3 세계에 있어서 동서협력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
| |
답: 물론 어려움은 엄청나게 크지만 영속적인 평화를 확보하고 긴장완화를 유지 ㆍ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런 종류의 협력은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세는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이며,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 경제선진국의 비상한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 세계에 대한 미 ㆍ 소관계의 역할이 금세기 말에는 증대되리라고 생각하는가, 감소되리라고 생각하는가?
답: 발전도상국이 경제분야에서 성공하면 선진공업국가 전체가 세계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금세기 말까지 세계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점점 더 다양화가 진전될 것이다. 이는 타당하고 건전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견가능한 장래에 있어서 양 초강대국은 그들의 물리적 힘의크기라는 이유만으로도 계속 주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양국의 군사력, 경제력이 두 나라에게 어떤 특별한 권리 나 특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별한 책임만을 부여하고 있다 는 점이다. 두 나라는 핵전쟁을 회피하고 두 나라의 정상적이고 평화로 운 관계를 유지하며 세계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건설적 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전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