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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냉전사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제국간의 공존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
답: 이미 말한 것처럼 미 ㆍ 소 양국사회 간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정상적이고 유익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생 기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와 미국 관계 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 옛 러시아와 미국은 사회, 정치조직 면에서 서로 매우 달랐다. 가령 18세기 후반을 보면, 한편에 봉건적인 제정 러시 아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세계 최초의 부르조아민주혁명의 하나에서 생겨난 공화제의 젊은 미국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이 미합중국과 최선 이라고 해도 좋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러시아였다. 그같은 관계의 기초는 서로의 이익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데에 있었다. 뒷날 미국의 남북전쟁시, 러시아황제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지 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해군까지 파견했었다. 러시아의 군함들이 뉴욕 과 센프란시스코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황제가 미국 노예들의 괴로움에 대한 동정에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심중에는 나름대로의 외교정책 목표가 있었으며, 미국을 지원한 것은 그 목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지원한 사실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실로 남아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1917년 10 월에 혁명을 일으켰을 때 미국인이 보답해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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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혁명과 미국
- 10월혁명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
답: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뒤떨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완전히 알지 못하든지, 기껏 해야 막연하게 알고 있는 상태세 불과했다. 관심과 공감을 표시한 사람 들은 비교적 정치의식이 있는 지식인과 노동자들이었다. 미국의 신문기 자인 존 리드(John Reed)는 러시아혁명견문기인『세계를 뒤흔든 10일간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중에서, 그러한 경향을 상징 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책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쓰여진 책 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 중의 하나이다.
정부와 매스컴을 포함한 미국의 보다 광범위한 엘리트들에 대해서 말 하자면, 그들의 태도에는 누그러뜨리기 힘든 적의감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우익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치적 지도층 중에서 비교 적 각성된 그롭 속에서조차 우리나라의 새로운 사회는, 영원히 역사의 사생아로서 취급될 운명을 가진, 불의 (不義)의 아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사회 주의와 소비에트러시아에 대 한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경향 이 형성되는 기초가 놓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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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소련관의 발생
- 이러한 견해가 지금도 지배적이라는 건가?
답: 그렇다. 이 전통적 인 태 도가 소련에 대 한 미국인의 행동 중에서 여전히 일정한 역 할을 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개개의 민족은 혁명을 일으킬 고유한 권린, 즉 무기를 들고 일어설 권리와 사회정치제도에 필 요한 변혁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명 제를, 일찌기 그것도 아 주 명확히 제시한 것은 미국의 독립선언이었다. 그러나 1917년에는 러시아혁명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정함에 있어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보여주었던 지혜는 생겨나지 않았다.
미국정부가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보았나 하는 것은, 미국의 적의가 즉각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았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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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혁명을 압살하려고 하는 제국연합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미국군은 우리나라의 북부와 동부에 침략을 자행했던 것이다.
더우기 중요한 것은 소련의 내전기간중, 미국이 러시아혁 명 의 적들에 게 융자제공과 무기공여를 포함한 대규모의 원조를 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콜차크(Kolchak)제독(제정러시아의 반혁명파의 제독), 아타만 세묘 노프(Ataman Semyonov) 둥의 반혁명 지도자들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러시아의 신정부를 전복하려고 하면서 약 40억 달러를 썼다.
- 그러나 일부의 소련전문가들은 그 신정부가 세계혁명의 위협을 조성하고 대외관계의 많은 부분을 단절함으로써, 오히려 서방측의 적 의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답: 세계혁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는 이미 그점에 대한 레닌의 입 장을 언급한 바 있다. 혁명이 러시아의 대외관계에서 초래한 변화를 말 한다면, 제정러시아가 식민국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는 서방측의 반(半)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제 1차대전에서는 영 ㆍ 불협상측이 독일황제 및 그 동맹국과 제국주의 적 세력으로서 경합하는 가운데, 수백만의 러시아인을 병사로서 사용했다. 러시아국민은 그들의 근본적인 필요와 이해관계와는 상반되는, 완전히 부당한 목적을 위해서 이용되고, 착취되고, 죽어갔다는 느낌을 강 한게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감정이 1917년의 혁명을 일으킨 중요한 요인 의 하나였다. 따라서 레닌정부가 최초로 손댄 일은 러시아를 전쟁으로부터 이탈시켜, 프랑스, 영국, 기타 다른 나라들에의 여러 형태의 반식민지적 의존상황을 해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저 소련이 세계에 둥을 볼리고, 세계가 사회주의로 되지 않는 한, 관계를 거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 계와 교류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소련이 추구하는 것은 평등한 조건으로 교류하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제와 자원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고, 외국은행의 이율이 아닌 우리나라의 국익에 기초한 외교정책을 유 지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서구와의 관계를 민주화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또한 아시아제국과의 관계도 변했다. 그 하나로써 아시아에 있어서 제정정부의 식민지적 청구권을 모두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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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러시아 혁명정부는 외국과의 관계수립을 희망하는 의사를 명확하게 표명했던가?
답: 물론이다. 혁명 초기에, 정확히 말해서 혁명 이틀째 되던 날 미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에 대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교섭을 시작하자 고 호소했다. 그런 다음 얼마 지나지않아 우리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관계수립을 제안했다, 이어 1918년 5월에는 상호이익에 기초한 경제관계 의 수립을 제안했다.
레닌은 러시아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적십자대표단 단장인 로빈슨 대령을 통해 미국에 통상특권을 부여하고 그밖의 통상관계도 수립한다는 자 신의 계획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회답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주미 (註美)통상대표 L. 마르텐스 (L. Martens)는 미국의 실업가들과 양국간의 경제관계에 관해 활발한 교섭을 벌 이기 시작해사 1919년 말까지 32개 주의 기업 약 1천 개 사(社)와 관계를 수립했다. 마 르텐스는 미국 실업계의 대부분이 소비에트러시아와의 통상에 호의적 이 라는 인상을 받았다. 계약도 수없이 체결되었으나 미국정부가 개입 해 마르덴스를 ‘바람직스럽지 않은 외국인’ 이라며 미 국으로부터 내쫓아 버렸다.
- 옥시덴털 석유희사 희장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가 소련 에 갔던 것은 그 무렵 이었던가?
답: 그렇다. 그는 신생 러시아와 거래관계를 맺은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해머는 자진해서 왔으며 우리는 그를 환영했다. 그뒤 우리는 그밖 의 미국실업가들에게도 우리와 경제관계를 트기 위해 방문해 달라는 일반적인 초청장을 보냈다. 외국 회사와의 거래는 약 30억 달러의 거액에 달할 것이라는 평가였다.
- 그 액수는 최근의 미 ㆍ 소간 거래의 1년치 이상에 해당한다.
답: 그렇다. 현재의 달러가 당시 달러 화 가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우리와 서방 간의 통상 가능성 은 컸었다. 혁명 초기부터 미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와 경제관계를 발전 시킨다는 것이 우리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레닌은 당시 “특히 미국과 의 사이에” 라고까지 강조하고 있었다. 레닌이 미국을 특히 중시했던 데 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 산업의 규모와 효율성은 중요한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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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이었다. 또한 그 당시 유럽과의 관계가 대미관계보다도 나빴었다는 사정도 있다. 나아가 레닌은 미ㆍ소간의 경제관계를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관계가 세계의 안정과 평화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는가고 나는 생각한다.
- 이 초기 시절에 그밖의 어떤 미국의 실업가가 소련정부로부터 거래 허가를 받았는가?
답: 해리만 일가를 포함해 상당수가 있었다.
- W. 애버델 해리만(W. Averell Haxriman, 미국의 정치가. 전 소련주재대사. 전 욕주지사-역주)이 소련에서 경제적 권익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답: 해리만 가(家)의 기 업은 (소련에서) 대규모의 망간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다.
- 그래도 미국정부는 소련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답: 사실 그랬다. 미국은 ‘갓난 아기를 요람에 있을 때 교살시켜라’ 는 당시 원스턴 처칠의 충고를 따르려고 했던 모든 연합에 가담했다. 군사 개입으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자, 서방측은 경제 보이 코트와 의교적 불승인이라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훨씬 소극적이긴 해도, 소련 국가를 인정하자 않는다(nonacceptance)는 동일한 태도가 다른 형식을 취한 데 지나지 않았다. 기본적인 가정은 똑같았다. 즉 소련 의 존재 그 자체는 1920년 당시 베 인브리지 콜비(Bainbridge Colby) 국무 장관이 주장한 바와 같이 “다른 모든 위대한 문명국의 정부를 전복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소련과 서방측
간에 공동의 기반 이란 존재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콜비는 또한 이같은 적대국과의 정상적인 관계수립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일치된 이해관계는 없다고도 말했다.
- 하지만 소련 지도자들도 미국을 적대 국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답: 미국측의 적의와 침략적인 태도에 대해 소련정부가 좀더 강력한 자세를 취한 것은 분명하지만 두 나라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앞의 콜비 장관의 언명에 대 해서 당시 소련 의 무담당 인 민위원 게 오르기 치 체 린(Georgi Chicherin)은 다음과 같이 회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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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 ‘콜비는 소련에서 자본주의 제도가 자배적으로 되는 경우에 만 두 나라간에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았다고 믿고 있으나 이는 매 우 그릇된 생각이다. 우리는 그러 한 생각과는 반대로 두 나라의 사회ㆍ정치제도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완전히 적절하고 합법적 이고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러시아와 북아메리카 양측의 이익에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계는 두 나라간의 통상발전과 두 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중족자킴에 있어 필요하다”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와교언민위원이 해외 대사에게 보낸 전보, 1920년 9월 10일, 520호,
『소련외교정책 자료』제 3권, 모스크바, 1959년). 그러나미국 의 정치지도자들이 이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예는 긴 세월이 걸렸다.
- 어떻게 보더라도 새로운 관계를 열의를 갖고 시작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 같다.
답: 나는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관해 말해 왔지만 이는 좀더 폭넓은 상황에 서 보면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정부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미국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인의 선의와 현실적인 접근방법 및 진정으로 관대 한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았다. 소련은 미 국 국민으로부터 다소의 물질적 원조를 받기 까지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1920년대 초기 우리나라가 기아와 큰 경제적 곤란에 빠졌을 때에는 미국인 약 1만 명이〈소비에트러시 아기 술원조협회〉의 주선으로 소련에 왔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재건을 도와 주기 위해 왔던 것이다.
미국인과 소련의 노동자ㆍ전문가들이 협력해서 농장과 기타 사업의 건설을 도왔다. 미국내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많은 액수의 기금이 모아졌다.
- 이들 미국인도 여권을 돌수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는가?
답: 당시 미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공 히스테리를 감안한다면 그 들은 실제 대단한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의 감정 과 유례를 찾기 힘든 러시아혁명의 실험에 대한 큰 관심이 너무나 드높았었다. 동시에 미국 실업계에서는 소련과의 거래가 수지맞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제안했고 그들은 찾아왔다. 당시 소련과 거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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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실업가는 모두 2천 명에 달했다. 30년대 초까지 미국 회사 약 40 개 사가 소련에서 영업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포드자동차회사와 제너럴 일택트릭과 같은 거대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인 노동자, 전문기술자 수천 명이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었다. 고리끼시에 소련 최초의 자동차공장 건설을 도와준 사람들 가운데는 흣 날 미국 노동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월터 루터(Walter Reuther, 전 (前)전미 자동차노조(UAW)위원장, 전 산별노조회의 (CIO)회장-역주)와 빅터 루터(Victor Reuther, 월터 루터의 아우-역 주)도 있었다. 또한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력 발전소의 건설을 원조해주었던 H. 쿠퍼(H. Cooper)처럼 우리 나라의 높은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1931년에는 미 국의 공업설비 수출총액의 무려 40%가 소련으로 들어 왔다. 같은 해 전문기술자 약 4천 명을 소련에 와서 일하도록 초청했는데 10만 건 이상의 응모신청서가 접수했다. 두 나라간의 협력의 역사에 서 실로 빛나는 한 페이지였다. 양식(良識)과 경제적 이익의 일치는 곤란한 시대에 서로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고자 하는 충등보다도 월싼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요컨대 소련은 미국의 경제공황의 어려움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미국의 실업가와 전문기술자들은 우리나라 의 경제건설에 기여했던 것이다.
- 현재 미국에는 실업자가 수백만 명이나 있다. 『뉴욕타임즈』에 시베리아에서 일할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면 어떨까?
답: 서방에서 시베리아에 대해 갖고 있는 특수한 이미지를 감안할 때 그러한 짓을 하면 큰 소란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말하자면 소련은 그 이상의, 훨씬 폭넓은 제안을 하고 있다. 우리는 두 나라간의 통상과 경제관계의 정당한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를 모조리 제 거하기를 원한다. 이것만으로도 미국내에 새로운 일자리를 수천 개나 마련해 줄 것이다. 물론 진정한 긴장완화 아래서만 가능한 경제의 비군사화(非軍事化)가 실현되면 고용도 현재보다 대폭 늘어날 것이다. 긴장완화가 가져오는 경제적 영향이 결합되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제국의 전반적인 고용사정은 크게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로 말머리를 되돌려보자.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 에 걸쳐 장래의 긴장완화로 연결될 둣한 바람직한 조짐이 나타났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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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1931년에는 통상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미국내 에서 소련에서의 ‘종교의 자유’ 를 둘러싼 캠페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근 우리가 목격한 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또 한 ‘소련의 덤핑 위협’ 에 대한 또다른 행페인도 벌어졌고 이어서 소련에 대해 차별적인 통상법령이 도입되었다. 미ㆍ 소 두역은 격감했다.
- 그러나 그후 1933년에는 드디어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그것은 전환점이 아니었던가?
답: 그렇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는 그랬다. 첫째 그것은 장래 정상 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둘째로 백악관의 태 도가 바뀌어 새로운 출발점에 섰음을 의미했다. 백악관은 16년간에 걸 친 불승인정책을 고수만 뒤 마침내 소련이 실재 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 동하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D. 루스델트 대통령과 우리 나라의 의무담당 인민위원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 노프(Maxim Maximovich Litvinov)가 서한을 교환했다.
미국측의 주장으로 양측은 서로의 내정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엄숙히 서약했다. 나아가 양측은 각자의 정부에 의해 통제되거나 종속 되는 조직이 직접 또는 비밀리에 상대방 국내의 평화와 안녕과 치안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억제하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상호 금지된 이같은 행동 가운데는 상대국의 정치적ㆍ사회적 질서를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ㆍ선동도 포함돼 있었다. 오늘날에 는 미국측이 소련에 대한 전복활동, 가령〈라디오 리 버 티(Radio Liberty)〉 나〈자유 유럽 방송〉의 활동을 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가치가
있다. 미국은 양국간의 상호승인협정을 위반, 소련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모든 비밀 또는 반(半)비 밀 공작을 기도해 왔다.
- 소련은 미국에 대해 그러한 종류의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 인가?
답: 우리는 방금 언급한 1933년의 문서 규정을 완전히 준수, ‘공공연한 활동이나 비밀활동을 불문하고 미국의 평온, 재산, 질서, 치안을 조 금이라도 해칠 듯싶은’ 행동을 장려하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의 영 토와 속령을 막론하고 미국의 영토보전을 침범하거나 강제로 미국 전체 나 그 일부의 정치적 질서를 변혁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동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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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선전’ (『1933년의 미국의 대외정책』제 2권, 정부간행물출판국, 워싱턴, 1949 년-역주)도 하지 않고 있다.
-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두 나라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다고 생각 되는데.
답: 분명히 그렇다. 그 전쟁 자체는 미 ㆍ 소관계에서 실로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전쟁이 진행됐던 몇 년간은 두 나라 지도자와 군부 사이에 긴밀한 협력관계가 유지되었고,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우호적인 감정, 심 지어 형제애라고까지 할 만한 감정이 전례없이 고조된 시기였다. 이 모 든 것은 국민들의 기억속에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당시 미국인, 특히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소련의 엄청난 전쟁노 력을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설즈버거(C. L. Sulzberger)가 회상록 속에서 인용하고 있는 어느 독일주둔 미군 야전군사령관의 명령 가운데 한 귀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의 수백만 명의 병사와 민간인 들이 우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즉었다. 우리는 이점을 기억해두자. 만약 선전을 듣고 러시아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멈춰서서 생각 하라. 그들 역시 여러분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C.L. Sulzberger,『A Long Row of Candles』, 뉴욕, 1969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감정을 지워버리고 만 것은 몇 년에 걸친 냉전과 집중적인 반소 세뇌작용이었다.
- 그러나 그러한 밀월여행 기간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던 가?
답: 물론 다소의 문제점과 곤란이 있었다. 미국측은 몇차례나 약속했 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에 제 2 전선을 여는 것을 2년간이나 지체시켰으 며그 결과 소련측의 인명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이같은 지체가 우리나 라 국민들 사이에 다소 씁쓸한 기분을 자아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과 나치 독일 사이에서는 몇 차례의 비밀 교섭도 벌어졌었다. 우리나라 역사가 한 명이 최근 입증한 바이지만, 알렌 덜레스(Allen Dulles, 전 CIA국장. 제2차대전 중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에 소속)는 스위스 베론에서 나치스와 회담했으며 터어키의 앙카라에서는 별도의 접촉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원자폭탄의 개발이 줄곧 소련에 대해 비밀에 붙여졌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두 나라 관계 전체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 수지는 틀림없이 흑자이며 이것이 제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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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계대전 후의 관계개선의 기초로 기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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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전의 귀결에서 봉쇄로
- 그러나 그대신 우리는 거의 즉시 냉전에 돌입하지 않았는가?
답: 냉전을 주제로 다룬 책은 수없이 많으며 앞으로도 그런 책이 계 속해서 출판될 것이다. 냉전은 아직도 뜨거운 주제가 되고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냉전의 책임을 소련에 전가시키고 있는 미국 의 지배적인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주된 책임이 실로 미국과 영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 점은 미국의 이른바 ‘수 정주의파’ 역사가들이 지난 20년간 풍부하게 입증해온 사실 이 다.
- 그러한 학파에 대해서는 신정통파(the neo-orthodox)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알고 있는지ㆍㆍㆍㆍㆍㆍ
답: 잘 알고 있다. 정통파라는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하 지만 나는 미국 역사가들 사이의 집안싸움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 상황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따름이다.
- 냉전이 실제로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마상 믈랜을 거부했을 때부터가 아닐까?
답: 모스크바측에서 볼 때 냉전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45년 봄, 제 2 차세계대전이 종결되기 몇주 전에 이미 우리 는 미국의 정책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ㆍ 소관계의 많은 분야에서 루스델트 대통령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종식된 바로 그날 무기대여법에 가 초한 무기원조는 갑자기 중단되었고 이미 소련으로 향하고 있던 몇 척 의 선박은 도중에 되돌아갔다. 다액의 재건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깨졌다. 게다가 말할 것도 없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되었는데 우리가 보기에 이는 제2차대전 최후의 집중폭격이 아니라 냉전을 예고하는 최초의 집중폭격이었다. 원폭의 투하는 적과 동맹국 양쪽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현리 스팀 슨(Henry Stimson)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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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그의 일기에서 논평한 바와 같이 “소련을 설득하여 협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원스턴 처칠은 역시 마살 플랜에 앞서 미국 미주리주 풀 튼(Folton)에서 저 악명높은 연설을 했는데 사실 이 연설은 냉전을 공식 적으로 포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억해두어야 할 점은 처칠의 이 ‘철의 장막’ 연설은 그 자리했에 참석던 미국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공공연하게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947년 2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전세계적인 반공성전(反共질戰)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마샬 풀랜이 발표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와 같았으며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이 계획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드러났다.
그후에 소련이 ‘공정한 거래’ 를 거부하고 그 대신 냉전을 격 화시키는 길을 선택했다는 설이 날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해금된 마살 플랜에 관한 미국측 문서를 조사해보면 이 계획은 소련에 의해 거부되게끔 신 중하게 계산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미국의 당국자들은 소련이 이 계획에 참가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제임스 포레 스털(James Forrestal, 전 국방장관)은 당시 “만약 그들이 실제로 참가한 다면 이는 최악의 재난이 될 것이다.” 라고까지 개 인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찰스 볼렌(Charles Bohlea, 전 외교관)은 훨씬 뒷날 소련을 명확하게 제외시키지 않았던 것은 ‘엄청난
도박’ 이었다고 고백했다.
- 바꿔 말하면 1945년이후 미국으로부터 확실하게 적의를 느꼈다는 말인가?
답: 우리는 정세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실제로 워싱턴으로부터 전쟁의 위협조차 느끼고 있었다.
- 서유럽에서는 1945년 이후 소련이 침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 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남아프리카로 이주했으며 나 는 1945년에 국제관계를 배우기 위해 예일대학에 갔다.
답: 그러한 류의 공포가 서유럽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공포는 전후 유럽의 매우 불안정한 심리적 분위 거에 근거하고 있다. 유럽은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무시무시한 시련을 겪었기 때분이다.
그러나 이같은 공포를 낳은 주된 이유는 제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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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전개하기 시작한 ‘소련의 위 협’ 캠폐인이었다. 소련에 대한 선의의 감정은 순수하고 폭넓게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럽을 나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 을 수행만 것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서방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와 당시의 정세 사이에는 매우 기분나쁜 유사성이 있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불합리한 편견과 공포가 똑같은 목적, 똑같은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전과 마찬가지로 이유없는 공포를 퍼뜨리는 자들은 대중과 엘리트를 반소(反蘇) 여른의 주변에 결집시키려 하고 있으나 결국은 이렇게 조작된 공포 그 자체에 스스로 굴복, 정상적인 판단을 잃고 말지도 모른다. ‘소련의 위협’ 이라는 전후의 인식에 관한 한 서방측에 공포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은 소련측에 있어서 필씬 근거가 분명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소련측의 감정은 그뒤 미국의 진짜 전쟁계획이 알려졌을 때 충분한 근거가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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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시(終戰時)에 이미 대소 핵전쟁을 계획
- 전쟁계획이라고? 이제 막 평화가 실현된 때에?
답: 그렇다. 미국의 의도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던 가장 두려운 의혹 에는 다소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것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계몽적인 동시에 고통스런 일이다. 이미 1945년 말경 부터 미국의군수뇌부는 소련에 대한 핵공격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모 두 합쳐 인구 1천1백만 명이 살고 있는 소련의 대도시 20개가 선제 제 1격으로 원자폭탄 1백 96개를 투하시킬 목표로 선정되아 있었던 것이다.
- 서유럽에서는 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오늘날까치도 그같은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답: 그렇다 해도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정부와 문헌, 가령 1945년 I2월 자의 통합참모본부 통합정보위원회 보고 제329호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계획은 진짜로 있었다. 이 보고와 그 뒤에 작성된 같은 종류 의 보고는 1946 년부터 49년에 걸쳐 ‘차리어 티어 (Charioteer)’, ‘더블 스타(Double Star)’, ‘풀리 트우드(Fleetwood)’, ‘트로전 (Trojan)’ 둥의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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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아래 작성된 상세한 전쟁계획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전쟁준비는 1949년의 ‘드롭쇼트(Dropshot)’ 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 것은 일부 중동과 아시아 제국의 지원 아래 NATO의 전군을 동원하는 대소전면전쟁 계획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제 3차세계대전의 청사진이었다. ‘드롭쇼트’ 에서 원자폭탄 약 3백 발을 투하해서 우리나라를 파괴 한디-이는 ‘애토마이징(Atomizing)’ 이라고 통칭되고 있었디- 는 계 획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군부대가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이어서 소련 체제를 근절시키는 것도 상정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우리나라 영토에 장래 성립될 정권의 행동규범까지도 구체적으로 작성해놓고 있었다(Anthony Brown 編, 『Drop, shot: The American Plan for World War III Against Russia in 1957』, 다이 얼 프레스, 뉴욕, 1978년). 세계를 파시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2천만 명 이상의 생명을 잃은 지난날의 동맹국에 대해 카르타고(Carthage, 아프리 카 북부의 고대 도시국가)적 평화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위대한 전쟁 영웅 원스턴 처원이 당시 소련을 핵폭탄으로 파괴하자고 제안한 사실도 결국 기록에 남 아 있다.
답: 그대로이다. 처칠은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그같은 제안을 했다. 엘런 브루크(Alan Brooke)의 일기에 기록돼 있듯이 처칠이 최초로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종전 직후였다.
- 헨리 캐보트 로지(Henry Cabot Lodge,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 전 월남 주재 대사)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슷한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다.
답: 그 당시 소련은 그러한 신호를 수없이 받았으며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것들은 말만의 협박이 아니었다.
- 그것은 그같은 전쟁계획을 작성한 군부의 희망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았을까?
답: 희망적 사고의 산물도 확실히 있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도 존재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말보다 웅변적으로 그 실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대규모의 군비확충 경쟁과 NATO의 증강이 진행되었으며 군사기지와 제 1 격 폭격기들이 우리나라를 포위했다.
대소 핵공격의 가공할 계획이 단지 문서상으로만 머무르게 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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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결국 이성(理性)이 미국정부 내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소련의 군사력이 강화된 결과 무엇보다도 미국의 원자무기 독점이 급속히 종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정부는 소련 에 대한 예방적인 핵전쟁을 중요한 옵션으로 고려했으나 그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이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에는 ‘트로전’ 이라 불리우는 미 전략공군사령 부의 핵 제 1격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NSC)문서 NSC-68은 소련에 대한 예방전쟁을 승리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소련에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작전만으로는 크레믈린에 항복을 강요하겨나 항복하게끔 유도하는 결괴를 가져오지 않을 것으로 주정된다......” (Thomas Etzold, John Lewis Gaddis 編, 『Containment: Documents on American Policy and Strategy』, 1945~1950, 컬럼비아 대학 출판, 뉴욕, 1978년)고 이 문서는 진술하고 있다. ‘드 롭쇼트’ 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 아마 그들은 그렇게 하기에는 원자폭탄이 충분치 못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답: 그뿐만은 아니다. 전격적인 핵전쟁으로 끝나지 않고, 미국이 전 세계를 파괴하는 무제한의 소모전에 말려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높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무렵에 이미 핵무기 시대에는 군사적 우위가 제한된 가치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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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 의 진상
- 그 점은 아직도 분명치 않은 것 같다.
답: 그 당시 미국은 냉전정책의 추진방법을 어느 정도 수정했으나 목표 는 처음 그대로였다. 미국은 예방전쟁을 당분간 옆으로 밀어놓고서 냉 전하의 대소정책 의기초로서 ‘봉쇄’ 독트린을 채택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소련에 대해 모든 점에서 끊임없는 압력을 가함으로써 소련의 정치체제를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전략이었다. 다른 여러가지 압력 가운데 군비경쟁은 소놘을 피폐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이 독트린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그 창안자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1950년에 작성되어 1975년에 공표된 ‘봉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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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바이블이라고 할 만한 NSC-68로부터 중요한 귀절을 약간 인용하고 자 한다.
이 봉쇄정책의 주요수단은 바야흐로 압도적인 군사 우위가 될 터이었다. “현존하고 있고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우월한 종합적 군사력이 없다 면 ‘봉쇄’ 정책-이는 사실상 계산에 기초해서 점진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책인데-은 한낱 정책상의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앞 의 책, p. 402.)고 이 문서는 솔직이 진술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군사적 우위가 달성되기 전까지는 소련과의 어떠한 교섭도 “군비증강 계획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함에 있어서......바람직한......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앞의 책, pp. 423~424.)고 진술하고 있다.
그밖에 제안되어 적극적으로 채택된 수단 가운데는 “대소 충성으로부터의 집단적 이탈을 측진시키기 위해 계획된 공공연한 심리전” 과 “일부 선정된 전략적 위성제국에서의 동요나 반란을 유발, 지원하는 것을 목 적으로 하는 경제 전쟁과 정치, 심리전 분야에서의 비밀수단에 의한 대 담하고 시의적절한 조치와 작전의 강화......”(앞의 제, pp. 435~436.)가 있었다.
- 그러나 계획은 계획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같은 조잡한 구 상을 반드시 실험 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답: 아, 그렇지 않다. 그러한 계획은 결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 제로 운용되는 지침이었다. 우리가 19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그러한 취급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NSC-68에서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한편으로는 공격적인 노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결백한 방어자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NSC-68은 “어떠한 정책을 발표하건, 그리고 채택 된 조치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건 간에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내외의 호의적이지 않은 반향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도록 배려 해야 한다” 고 냉정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최종적인 목표, 즉 소련의 영향력을 후퇴시켜 “소련 체제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앞의 책, p. 434. 389)을 지향하고 있었다.
-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는 소련의 국내정세에 영향을 미치려는 데 그의 외교노력 을 집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ㆍㆍㆍ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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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브르제진스키가 그런 종류의 정책을 완고하게 지지하는 자라는 평가는 이미 확고히 정착돼 있다. 브르제진스키는 과거에 그러한 정책을 형성하는 데 공헌했으며,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부에 참 가하고 있을 때에도 그러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내정문제의 간섭 이라는 수단으로 소련 국가를 ‘개조한다’ 는 NSC-68에서 독트린화한 이 명제는 카터 정권의 발언과 행동에 잘 나타났으며 그 후임자들도 이를 즉각 채택했다.
- 아나톨라 도브리닌(Anatoly Dobrynin) 대사는 현리 키신저에게1959년부터 1963년에 걸쳐 초강대국간의 관계를 개선할 기화를 몇 차례 나 상실했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키신저, 『The White House Years』, p. 113.)
답: 대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핵전쟁은 생각할 수 없으며 자살행위라는 것을 많은 미국인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뒤였다. 냉전의 얼음을 깨뜨리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1959년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의 방미 (訪美)이며 이어서 60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 소련 상공에서 개리 과워즈(Gary Powers) 비행사가 격주당한 U-2기 사건의 결과를 말하는가?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이젠하워가 파리에서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에 성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 해 CIA가 고의로 꾸민 것으로 이 야기되고 있는데ㆍㆍㆍㆍㆍㆍ
답: 이 사건을 둘러싼 CIA의 음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최 근 보도된 바와 같이 CIA가 아아젠하워의 모스크바 방문이 실현될 경우에 대비해서 대통령 전용기에 정찰기기를 싣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U-2기의 비행은 대통령 자신이 승인한 것이었으며 또한 대통령은 이를 매우 서투른 방법으로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에 파리수뇌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다소 어리석고 거 의 우발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체를 확실히 폭로하고 있다. 즉 아이젠하워 정권은 통상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 힐 수 있는 기회보다 더욱 중시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사태를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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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개선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를 기회가 상실되었다.
케네디 정권 초기 2년간에도 몇 차례의 기회가 그대로 지나갔다. 출 범 직후 ‘미사일 갭’ 을 강조하고 쿠바의 피그만 상륙침공작전을 감행 함으로써 거의 운신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케네디 정권이 대소 냉전자세를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쇼크를 겪은 뒤였다. 그 결과 부분핵실험금지조약 조인 등의 건설적인 조치가 몇 가지 취해졌다. 그러나 그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이러한 과정도 갑자기 중단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평화공존을 대신할 타당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국제관계 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 뒷걸음치면 칠수록 그 댓 가는 엄청나게 커질 것이디. 1960년대의 경 험은 이를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걸쳐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 양국관계의 타개를 70년대 초에 우여곡절 끝에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을 통째로 허송했으며 그것은 매우 값비싼 손실이었다. 그 결과 군사력이 엄청나게 증강되었다. 쿠바 미사 일 위기는 인류를 전쟁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 던 러스크(Dean Rusk, 케네디행정부의 국무장관)는 ‘얼굴을 맞대고’ 노려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
답: 그렇다. 그뒤 동남아시아에사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은 미 국 국내에 위기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후 장기간에 걸쳐 국제정세를 흔란시켰다.
이어서 1967년에 중등에서 6일전쟁이 일어났다. 우리는 15년이 지난 치금까지 도 이 분쟁의 장기적인 여파를 겪고 있다. 중동은 여전히 끊임 없는 분쟁의 온상이며 적절한 해결책다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좀더 작은 위기도 몇 차례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대부분은 전체적인 긴장완화의 정세 하에서였더라면 회피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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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낡고 유치한 소련관
- 그러나 60년대의 긴장을 거쳐 70년대 초에는 사태가 호전되지 않았던가?
답: 확실히 좋아졌디. 나는 그러한 일련의 사태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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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지는 않다. 그것은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서 실로 진실의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에 걸쳐 입안된 정책의 전체 구조가 심각 한 취약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으며 미국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제문제와 관련성이 없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미국 외교정책이 종종 비생산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 미ㆍ소관계는 그러한 변전을 거친 뒤, 80년대에 들어 사실상 50년대의 냉 전시기로 되들아가고 있는 듯한데ㆍㆍㆍㆍㆍㆍ
답: 그렇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가 확실한 교문을 가르쳐준 악동 같은 경험을 모두 겪은 뒤에도 미국정부는 또다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동일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분명 시대는 바뀌었다. 역사는 되풀이될 수 없으며, 되풀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 리는 과거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그것을 망각해버린 듯이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유진 로스토우(Eugene Rostow)는 ACDA(군비 관리 군축국)국장에 취임하기 앞서 나와 가진 대담에서, 가령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레바논에 미 해병대를 파견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미국정부는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힘이 실제로 저하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답: 미국이 그와 같이 힘을 잃은 것은 군사력이 약해졌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미국의 군사력은 1958년 이후 착실히 증대돼 왔다. 그러나 미 국을 둘러싼 내외의 환경이 크게 변화한 결과, 그런 종류의 해외 작전 이 매우 값비싼 댓가를 치루게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이 점을 매우 분명히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로스토우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그의 불평과는 다른 흐름을 목격하게 된다. 베트남의 ‘교훈을 버리고’ 군사적 간섭주의를 미국의 정책수행 수단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 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부활되고 있는 냉전정책은 표면상으로는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에 걸쳐 이른바 미 국의 이익-당시 에는 ‘자유세계’ 의 이익과 엄숙하게 일치되었다-에 대한 유일한 적, 즉 소련으로부터 비롯되는 이른바 ‘위협’ 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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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는 군비경쟁, 군사기지와 동맹관계 그리고 대소경제봉쇄, 심리전 및 기타 파괴활동 등의 수단에 의해서 그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 고 공언했다. 그러나 ‘소련의 위협’ 이라는 것이 속임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가정에는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자신들 의 진정한 문제가 소련과는 거의 관제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 들이 많아져갔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가 더욱 복잡해져 가고 있는 가운데 소련을 악의 진원지이며, 미국이 당면한 모든 고통의 근원으로 보는 유치한 견해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가령 미국이 소련에 가장 적대적인 노선을 취한다 해도 이것이 과연 제 2 의 이란, 제 2 의 니카라과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과연 실업을 줄이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달러화(貨)룰 강화시키며 인들레를 억 제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그 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러한 정책이 미국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것인가?
미국의 대소 군사우위는 영원히 상실되었으며 결코 회북되 지 않으리 라는 것이 현실적인 사실이다. 대소 군사우위를 실현한다는 목표가 미 국의 공식적인 정책으로서 부활하고 있음을 보면 다만 늘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군사우위는 두엇에 기여할 수 있단 말인가? 점점 더 신형의 대량파괴무기가 개발된 결과 수많은 전통적인 개념이 쓸모없이 돼버렸으며 나아가 합리적인 정치목적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생각자체가 사실상 의문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미국과 그 동맹 국 간의 관계에도 장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미 국의 동맹국들은 경 제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짐으로써 정치적으로 대미의존도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동맹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해외에서 기도하는 모 험 가운데 어떤 것은 이들 동맹국들 사이에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베트남 말인가?
답: 그것은 그러한 모험의 한 예이지만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최근 우리는 외교정책상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동맹국 간의 관계에 분규가 점증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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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헨리 키신저는 워싱턴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게 될 정책
을 수행할 수 있는 서독지도자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12)
답: 이 문제에 대해서 키신저와 논쟁할 생각은 없다. 사실 미국은 아 직도 NATO 내에서 일증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름아 닌 키 신저 자신이 그의 회고록 속에서 빌리 브란트의 등방정책 에 대해, 미국측은 비록 이 정책을 특히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처했는지를 쓰고 있지 않는가. 미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 에는 물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국은 한때 명령만 하면 끝났던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은 정치와 외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이다.
-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서방 제국과의 관 계에서 후퇴를 맛보았다.
답: 그렇다. 그리고 카터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 카터와 그의 선거참모들은 공화당이 서서관계 (西商関係) 에 서 실패했다는 점을 중요한 쟁점와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카터 정권도 이 점에서 는 크게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 똑같은 말을 그 후임자에 대해 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동맹국들이 미국을 추종해서 제 2 의 냉전에 말려들기를 바라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 동맹국은 워 싱턴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갖가지 발언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 으로 말해서 이같은 발언을 행동에 옮기는 데는 상당히 소극적이다.
미국에 보내는 등맹국들의 신뢰도가 손상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조짐 은 많다. 그러나 그 관계가 아직 불균형적인 것임은 확실하다. 만약 미 국이 진정으로 원하든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특정의 문제에 대해 동맹국들을 억지로 따르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 점에서 키신저 외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동맹국을 무리하게 복종시키 려는 기도는 미국과 동맹국 쌍방에 점점 값비싼 댓가를 치루게 할지 모 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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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역대대통령을 평가한다
- 당신의 분석을 요약하면 미국이 적응하려고 노력해온 상황으로서 이국의 군사우위 상실, 제 3 세계의 새로운 역할, 서서관제의 변화 등 이 열거되고 있는데ㆍㆍㆍㆍㆍㆍ
답: 또 하나의 현상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미국 국내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1940년대 초부터 60년대 중반에 걸쳐 외교정책은 미국의 국 정 가운데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최우선적인 사항이 되어왔다. 그 시기 는 미국의 세계적 역할이 질적으로 확대됨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뉴딜과 계 2차세계대전을 거친 뒤 미국 국가정책을 둘러싼 전반적 상황을 크게 좌우한 것은 제국 (帝國) 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는 문제였 다. 이러한 해외진출은 일시적으로 내정면에서의 진정효과 (鎮静効果) 가 있었으나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냉전 십자군은 어떤 단계부 터는 미국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에 큰 위기를 야기시 키는 측매제가 되었다. 내정문제에 긴급하고 진지한 주의를 기울일 것 이 요구되었으며 재원 (財源) 의 재분배와 국제적 개입의 완화, 그리고 보 다 합리적인 외교정책의 채택이 요청되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친 국내적 위기는 외교정책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대두됨에 있어서 중요한 배경아 되었다. 구체적인 정책의 처방전이라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합의는 형성되지 않았으나 미국의 정 책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전반적인 사고방식의 흐름이 표출되고 있었 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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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 그래서 닉슨이 그 수정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새로운 현실에의 적응은 불가피했기 때문에 1968년에 민주당원이건 공화당원이건 간에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더라도 실질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뜻인가?
답: 그렇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적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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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민주당원 가운데는 가령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처럼 대소관계를 다름 에 있어서 공화당쪽이 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미국의 대통령이 공화당원이건 민주당원이건 간에 정책면 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때로는 공화, 민주 양당의 사이에서보다는 양당 각자의 내부에서 보다 중요한 정치적 대립이 벌어 지는 것 같다.
정치세력의 전체적인 상관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그 당시는 이러한 상 관관계가 긴장완화에 유리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 수뇌의 성 격, 특히 대통령의 개성, 즉그의 정견, 가치관, 도덕 자질, 심리, 기질 둥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모든 요소는 어쩌면 정당 간의 전통적인 차이가 애매하게 돼버린 오늘날에는 특히 대통령의 당적 ({problem}籍) 보다도 중요한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개성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가?
답: 물론이 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의 흐름은 기본적 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제, 사회, 문화 둥의 객관적인 요인과 조건 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국가의 최고수준에서의 일상적인 정책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결정된 폭넓은 구조속에서 이러저러한 정책 을 선택할 경우 정책결정자의 개성은 중요하며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상 황도 생각할 수 있다.
- 반공주의를 자신의 전 정치경력의 토대로 삼았던 리처드 닉슨이 긴장완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 점에 놀랐는가?
답: 나와 모스크바의 동료들이 당시 실제로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 씬 선견지명이 있었던 듯이 발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한 일은 어느 정 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1968년 이 연구소에 서 막 연구를 시작할 무렵, 닉슨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연구소의 스탭진이 처음으로 논문과 분석문서를 작성한 것이 기억된다. 이곳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워싱턴에서 권력을 장악하든 미 ㆍ 소관계에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점에 분명한 의견일치를 보 았으며 정부의 전문가들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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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서 그같은 결론에 이르렸는가?
답: 우리는 이미 내가 언급한 주요한 객관적 요인, 즉 미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국내정세와 변화를 분석했다. 비교적 유동적인 정세 가운데 1967년부터 68년에 걸친 공화당의 정치적 움직임이 매우 시사적임을 발 견했다.
공화당은 60년대 초 급격히 우경화함으로써 린든 존슨 대통령의 베트 남전쟁 확대정책에 무대장치와 압력의 지렛대를 제공한 정당이었다. 그 러나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공화당의 대 세는 골드워터 운동 (Goldwater Movement) 을 사실상 계승한 닉슨을 포함 해서 여러가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가정책과 관련해서 그들은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전반적인 동서관계구조의 수정과, 그 구조 에 대해 소련과 협상을 시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 었다. 이같은 공화당의 사고방식의 전환은 미국의 권력 엘리트 내부에 서 중대한 변화를 지지하는 광범한 합의가
조성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당파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화당은 ‘평화의 당’ 으로서밖 에는 정권을 탈환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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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설 (逆說), 닉슨의 역할
- 그렇다 해도 긴장완화의 개막, 미국대통령의 첫 소련 방문, 최초 의 SALT 합의 등이 닉슨의 이름과 결부돼 있다는 것은 여전히 기이 한 일로 남아 있다.
답: 곡정의 역사적 사건에 어떤 인물이 얼마만큼 공헌했는가를 정확 히 평가하는 것은 역사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의 하나이다. 긴장완 화가 진전되기 시작했을 때 미국정부를 이끄는 역할은 닉슨과 키신저에 게 맡겨졌다. 우리로서는 이 두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물론 조 매카시 (Joe McCarthy) 가 등장하기 앞서 매카시즘을 실천한 빨 갱이 사냥꾼이며 마녀사냥꾼인 리처드 닉슨이라는 사람 자신이 미 ㆍ 소 관계를 대결로부터 협상으로 전환시키는 과제에 착수했다는 것은 아무 리 보아도 역설적이라는 견해가 미국에서는 지배적이었다. 어떤 의미에 서는 닉슨의 평판이 긴장완화로의 전환을 용이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엘저 히스 (Alger Hiss) 사건 (미국무성 직원 히스가 하원 비미 (非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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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위원회에서 스파이 혐의로 고발돼 위증죄로 투옥된 사건. 당시 하원의원이 었던 닉슨은 이 위원회에서 히스 추궁에 활약했다) 을 선동하고 195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부엌논쟁을 벌였던 딕 닉슨이 미국을 배신하리라고는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버트 험프 리 (Hubert Humphrey, 케네디 행정부때의 부통령) 였더라면 그가 만약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닉슨만큼 효과적으로 보수파를 무 마시키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닉슨’ 이 등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를 취하지 않았다.
닉슨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변한 것은 주변 상황이었다. 닉슨은 언 제나 그리고 두엇보다도 정치가로서의 성공을 추구해왔다고 한다. 당선되 고 재선되어 20세기의 역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에 걸쳐 닉슨은 광신적인 반공주의, 반소 (反 條) 주의야말로 성공에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70년 대 초가 되자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 을 알 수 있을 만큼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번의 전술은 ‘대결보 다는 협상’, ‘평화의 세대’ 였으며 소련과 기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긴 장완화였다.
- 닉슨의 현명함은 그로 하여금 기어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 하게 하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닉슨은 국제정세라는 장기판에서 전 개되는 커다란 변화에 후임 대통령들보다도 훨씬 성공적으로 대처하 고 있었다는 것인가?
답: 설사 닉슨이 국내정치상황에 의해 긴장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도 록 강한 압력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관단하면 확실히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적응의 과정은 미국의 힘에 대 한 새로운 한계를 원만하게 기꺼이 수용하기까지에는 거리가 멀었다. 조류에 저항하거나 표리부동한 짓을 하거나 시간벌이를 하거나 하는 사 테가 매우 많았다.
닉슨은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약속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나 전쟁을 5년이나 더 연장시켰으며 캄보디아 침공으로 전쟁을 확대시키기 까지 했다. 닉슨에게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인, 캄보디아 인, 미국인 다수의 생명과 미국사회의 엄청난 혼란이 필요했다. 일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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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말해서 제 3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닉슨의 정책은 여전히 기본적 인 냉전적 패턴을 바꾸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 특히 칠레가 그 명백 한 예이다.
- 이란도 또 하나의 예이다.
답: 물론이다. 이란 내정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이미 1953 년부터 시작되었으며 CIA가 테헤란의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sadegh) 수상의 입헌정부를 쓰러뜨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방 대한 무기판매와 기타 수단을 사용해서 이란을 중동에 있어서 미국 지배 력의 주요 거점으로 만드는 데 착수한 것은 실로 닉슨 ㆍ 키신저 시대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 자신이 서 있는 발판 아래 에다 조만간 폭발하고 말 시한폭탄을 매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 혁명은 이란과 중동 전역에서 미국이 장기간에 걸쳐 이같은 방법 으로 계속 힘을 남용해온 데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놀라운 것은 이란 에서의 냉전정책의 패배가 파탄해버린 이 냉전정책을 부활시키는 구실 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70년대 초로 말머리를 들리면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아직 냉전의 타성 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세계정세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태도에는 증요한 변화가 발생했으며 그것이 실제의 정책에서 단계적으로 구체화되고 있 었다.
- 그리고 베트남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옴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 을 수행하지 않았는가?
답: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한 것은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 러나 미국 외교의 변화과정은 보다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최고무비의 지위를 자랑하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세계정세의 징 후는 버트남에서의 대실패 될씬 이전부터 수없이 나타났다.
가령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 소련은 전략 무기에서 미국과 동등하지는 않았으나 그 위기를 계기로 미국이 자신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강제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히 입증되었다. 유럽정세도 미국에 이전보다 될씬 큰 자제력과 유 연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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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낡은 정책이 그토록 많은 전통 (tradition) 과 편견, 그리고 - 이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 미국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매우 빈번히 방해 해 온 강력한 이익집단에 얽매이지만 않았더라면, 정책의 재검토는 베 트남전쟁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었고 그 결과 전쟁 자체도 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에게 진실을 납득시키는 데는 베트남전쟁의 비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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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은 루즈벨트
- 소련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난 반세기에서 가장 인상깊은 미국 대 통령은 누구라고 생각되는가?
답: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랭클린 D. 루스델트이다.
- 소련을 외교상 승인했고 제 2 차대전 중에 반 (反) 파시스트 연합에 서 동맹국이 되었기 때문인가?
답: 그것은 당연히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어떤 민족이라도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받는 대우에 의거해서 그 민족을 판단하는 정이다. 이 점이 특히 루스릴트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처럼 생 각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소련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 소련의 국가와 인민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기 때 문이다. 그렇지만 투스델트가 과거 수십 년 사이에 가장 탁월한 대통령 이었다는 우리와 평가는, 루스릴트의 재임중에 최고조에 달했던 미 ㆍ 소 관계에 미친 영향이라는 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역 사의 이 시기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쓰여진 저서는 루스델트 개인에 대 한 여러가지의 책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다.
소련 국민 가운데는 루스델트의 생애와 그의 언동을 매우 잘 알고 있 는 사람이 많다. 루스델트는 또한 대공황에 수반되는 국민들의 어려움을 현저히 경감시킨 뉴딜정책으로도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2 차대전 중 전체적으로 수미일관했던 반과시즘 정책으로도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 그러나 루스릴트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정권하에서 냉전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랬을 경우 루스델트는 소련에서 그와 다른 평 가를 받았을지 모른다. 원스턴 처칠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사심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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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이후에 바뀌었다.
답: 처칠에 대한 견해는 제 2 차대전 기간중에도 루스벨트와 달랐다. 그에게는 오랜 반소 (反蘇) 경력이 있었다.
루스릴트의 경우는 소련에서 항상 좋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따 라서 루스벨트가 오래 살았을 경우 상황이 과연 실제 역사대로 진전됐 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공동의 적이 분쇄당 한 V데이 이후, 두 나라 관계가 변화될 운명에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 가 없다. 미 ㆍ 소간에 전후 세계의 구성에 대한 위견 불일치와, 파시즘 의 붕괴로 고무받은 혁명적 변화의 과정에 대한 태도에 서로 차이가 있 었음을 감안할 때 여러가지 곤란과 모순 그리고 긴장이 생기는 것은 불 가피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냉전은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냉전회피에 기여할 수 있는 서방측
지도자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루 스릴트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증명될 수 없는 견해이다. 역사는 가 정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1982년 12월 루스델트 탄생 1백 주년 기념행사의 모습으로 판단하건 대 루스릴트는 미국에서는 아직도 논의가 엇갈리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답: 그대로다. 그 행사에 임하는 미국정부의 공식태도는 꽤 미묘했다. 레이건 정권은 루스낼트의 사진을 전세계의 미국 대사관 내에 걸어두자 는 은당한 제안조차 거부했다. 이는 워싱턴 당국이 루스낼트의 유산을 국민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명백한 의사인데 1982년의 미국 정부의 이같은 대도를 가령 시오도어 루스델트 (Theodore Roosevelt) 나 우 드로 월슨 (Woodrow Wilson) 기념일의 호화로운 축하행사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프랭클린 D. 루스릴트는 오늘의 미국정부의 기준으로 블 때 논 의가 엇갈리는 인물처럼 보이게 된다.
-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연설 가운데서 종중 루스릴트의 이름을 들고 나온다.
답: 그렇다 하더라도 대개는 몹시도 반 (反) 루스델트적인 맥락 가운데 에서이다. 또한 레이건 대통령은 루스빨트에게 네 번이나 투표했으나 매 번 루스겔트가 정책을 바꾸기를 희망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 그러한 태도에는 사상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물론이다. 1980년에 워싱턴에서 우세했던 정치나 사상은 알프 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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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Alfred Landon, 미국정치가. 캔자스주지사. 뉴딜정책에 반대. 1936년 대통 령선거에서 공화당후보로 루스델트에게 도전했으나 실패함) 의 캥폐인과 자유 연맹 (the Liberty League) 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 (反) 뉴딜의 전통에 뿌 리박고 있 다.
미국의 우익은 과거 50년간 자신들이 ‘루스멜트 혁명’ 이라고 간주한 뉴딜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그 유산을 소멸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우 익이 그동안 그러한 유산을 즐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익은 레이건 정 권의 탄생과 더불어 이를 완전히 근절시켜버릴 절호의 기회가 처음으로 찾아왔다고 보고 있다.
- 해리 트루먼은 어떻게 보는가?
답: 소련에서는 전후 미국대통령 가운데에서 가장 나쁜 이미지를 갖 고 있는 인물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책이 트루먼 정권 하에 서 급격히 역전됐음을 생각하면 이는 일리가 있다.
- 지미 카터는 백악관의 집무책상에 ‘일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는 트루먼의 좌우명을 걸어놓고 있었다. 미국인 가운데에는 트루먼을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로 꼽는 사람들도 있는데ㆍㆍㆍㆍㆍㆍ
답: l969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다소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게 있었다. 처음에 나는 ‘해리, 그들을 혼 내주라’ 는 슬로건이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것은, 예의 미국인의 오 만성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후 트루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전후 초기의 저 특이한 시기에 대한 미국인의 향수 로부터 기인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미국인에게 있어서 모든 일이 단순명쾌하고 영속성이 있고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그러한 상황이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주변사정 때문이라고 감지한 사람 들 극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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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아이젠하워
- 과거 50년 동안 소련에서 두번째로 인기있는 미국대통령은 누구 인가?
답: 존 F. 케네디일 것이다.
- 피그만 침공과 미사일 위기가 있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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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렇다. 더구나 ‘미사일 갭’ 미라는 엉터리 같은 구실 아래 광란적 인 새 군비경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역시 케네디이다. 케네 디는 분명 그와 같은 모든 실책을 저질렀지만, 그는 미 ㆍ 소관계를 변화 시키지 않으면 안되고 냉전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 던 정치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 주목할 만한 아메리칸 대학에서의 연설 이 나왔던 것이다. 케네디는 이 연설에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정치 와 대소관계에 대한 새호운 접근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약 10년 후에 긴장완화라고 불리우게 된 접근방법이었다.
이 역사적인 연설에 이어서 1963년에는 군비관리를 향한 최초의 중요 한 한 걸음인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이 조인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하나 의 가정의 상황을 말하게 되는 셈인데 소련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함으 로써 미 ㆍ 소관계의 중요하고도 적극적인 전환이 저해되었다고 믿는 사 람들이 많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이 두 나라 관계에서 상실된 유일한 기회는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아이젠하워 하에서 훨씬 더 많은 일이 달성될 수 있었다 고 믿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적어도 그의 외교정책에 관한 한 정 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아이젠하워는 임기의 대부분을 제 1 의 반공십자군 전사이며 뛰어난 도덕 설교가이고 ‘극한정책 (brinkmanship)’ 며 위대한 권위자인 존포스터 덜레 스 (John Foster Dulles) 의 사악한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국제정세 개선 의 노력이 실패한 책임의 일부는 시의 부적절한 U2기 모험의 책임을 프 함해서 아이젠하워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냉전의 얼음을
깨부수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아이젠하워 정권이었고 대통령 자신도 이 시도에
참여했다. 직업군인으로서 생애를 군두에 바친 아이젠하워가 조국에 군국주의의 위험을 경고한 미국 최초 의 정치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사실 정치가로 서의 최후의 발언에서 군산복합체에 대해 국민에게 경고하였던 것이 다.
- 그래서 후에 긴장완화로 알려지게 된 현상이 이미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제 2 기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답: 이 점에서 또하나 검증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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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당신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타당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태가 실제 일어났더라면 1960년대는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 닉슨 대통령에 대한 소련의 평가는 상당히 높다고 생각되는데.
답: 그대로이다. 왜냐하면 대결에서 협상으로, 냉전에서 소위 긴장왼 화로의 방향전환은 닉슨 정권하에서 닉슨 스스로가 참가해서 실현되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의 평가가 종종 그의 업적 자체보다도 오히 려 후계자의 업적과 비교함으로써 결정된다는 것만을 생각하더라도 닉 슨에 대한 최증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후임자 (의 업적) 가 대단히 비참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범용한 정치가라도 인상 적인 역사적 인물로 격상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 그 반대로 매우 훌륭한 정치가가 더욱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후임자의 그늘에 가려버리고 마는 경우도 있다.
- 후자의 사태가 닉슨에게 일어날 위헌성은 아직 없는가?
답: 그렇다. 적어도 1984년까지는 안전한 것 같다. 그런데 닉슨에 대 해서는 블가사의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미국 정치가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온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인상으로는, 이 사 람들이 공직을 떠나면 한층 현명해지고 균형감각도 갖고 통찰력도 높아 지고 정치가다와지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때늦은 지혜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공직이라는 것이 인간 본래의 능력을 엄격히 제약하는 일정한 한계를 부과하기 때문인지 도 모른다. 그러나 닉슨과 그의 정권에서 지도적 인물이었던 사람들은 이 원칙으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예외적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 람들의 경우 우리가 보는 것은 이와 정반대인 것이다.
닉슨에 대해서 말하자면 워터게이트 사건과 강제적인 사임에서 오 는 심리적 쇼크만으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역사적 시기에는 강력한 시대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닉슨 은 이 는리의 인도를 받아 몇 가지 중요하고 현실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 이디. 바꿔 말해서 역사가 닉슨을, 그의 인물됨이나 실력 이상으로 끌 어올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백악관으로부터 내쫓기자 닉슨은 또 다시 역사로부터 이 탈하여, 말하자면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나아가 인물됨으로서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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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긴장완화는 닉슨의 정치적 경력의 정점이었으나 닉슨은 실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사죄하기라도 하는 듯이 긴장완화를 비웃기 시작했다. 장래의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기록을 수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 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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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을 손상시키는 닉슨
- 닉슨이 위대한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남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답: 역사는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 매우 기묘한 장난을 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그러한 추측을 하는 것은 삼가하기로 하자. 그러나 닉슨이 대통령으로서 매우 곤란한 시기를 헤치면서 미국을 이끌었고 세계에 있 어서 미국의 힘의 보다 현실적이고 새로운 역할을 명확히 함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역사가 기록한다면 그것은 타당한 평가일 것이다.
나는 물론 외교정책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나 이 면에서도 닉슨의 기록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베트남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5년간이나 지체시킨 점과 캄보디아의 파괴, 칠레에서의 사건을 거듭 지적할 필요 는 없을 것이다. 내정에 대해서 말하자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최후를 장식했지만, 제왕형 (帝王型) 대통령의 경향은 닉슨이 시작한 것이 아니 라 미국 역사의 오랜 전통이었다.
- 닉슨은 자신의 저서 『The Real War』의 관매촉진을 위해 1980년 봄 유럽을 여행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가령 자신의 대통령 재임중 미국은 시종해서 ‘소련과 전쟁상태에 있었다’ 고 적고 있다.
답: 만약 그렇다면 1972년의 모스크바정상회담 후 스스로가 선언한 ‘평화의 세대’ 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닉슨은 그당시 자신의 업적에 대 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나머지 심지어 키신저가 ‘도취감’ 에 빠진 것 을 비판했을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가 논의만 것을 뒷받침 하는 명백한 표시이다. 닉슨이 1974년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최후로 정 상회담을 가졌을 때, 모든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개인적인 ‘우정’ 을 강조한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닉슨이 행하고 있는 작금의 발언에 대해 나는 다소 개탄해마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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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떤 의미에서는 닉슨에 대해 유감이다. 왜냐하면 그는 긴장완화르 의 이행이라는, 자신의 생애에서 단 하나의 크나큰 업적을 손상시키고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닉슨의 정치적 업적으로서 그밖에 어떤 것 이 역사에 남는단 말인가. 앨저히스 사건인가? 아니면 체커스 (Checkers) 연설인가?
- 1980년 5월 닉슨은 서독에서 아프가니스탄이 3차세계대전의 첫 단 계라고 언명했다.
답: 한때 사회에서 그처럼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처 럼 손쉽게 말을 뱉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현명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수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 지 않는 국제적 사건 하나하나에 3차세계대전의 시작이라는 딱지를 붙 인다면, 점점 현실감각을 모두 잃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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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의 애매한 태도
- 포드 대통령의 역할은 소련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
답: 포드 대통령이 1974년의 SALT II 에 대한 블라디보스톡 합의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업적을 이룩했음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 나 포드는 우익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즉시 강경정책으로 선회하기 시작 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SALT 협상의 동결, 군비재강화계획 의 채택, 나아가 미국의 정치용어에서 ‘김장완화’ 라는 말조차 없애버리 려고 한 행동 등이다.
그후 선거에서 패배한 뒤 그는 우익의 압력에 직면해 당황한 것이 잘 못이었으며 그것이 선거에 패배한 원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감스럽게도 선거시 포드의 행동은 미국의 정 치관습으로서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 카터 정권이 미 ㆍ 소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 는가?
답: 1979년부터 80년에 걸쳐 미 ㆍ 소관계에서 일어난 것에 비추어볼 때 미 ㆍ 소관계의 분야에서 일어난 모든 분규의 원친은 카터 정권이라고 생 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레이건, 헤이그, 닉슨 또는 키신저 등의 발언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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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뿌리칠 수가 있다. 더우기 나는 공정하게 생각하고 싶다. 두 나라 관계의 부정적인 경향은 카터 정권의 등장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긴장완화에 대한 최초의 반격은 1972년에 이미 느낄 수 있었다. 그후 닉슨 정권의 마지막 수개월 동안 국방성은 대통령의 외교활동의 자유를 대폭 제한했고 그 결과 닉슨 대통령은 1974년 모스크바에 왔을 때 SALT II 에 관련한 실질문제에 대해서 극히 조금밖에 협상할 수 없었다. 1974년 말 미 의회는 미 ㆍ 소통상협정을 파산시켰다. 그후 포드 대통령은 SALT 협상에서의 입장을 동결하고 대규모의 군비제강화계획을 개시했 다.
카터는 이러한 경향을 바꾸기는커녕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카터 정 권 출범 당시의 정세는 그렇게 일차원적이지는 않았다.
- 카터에 대한 소련의 당초 자세는 어떠했는가?
답: 카터는 자기 나라에서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터에 우리 가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었는가?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그러하듯이 그중에는 우리의 우려를 불러일 으키는 사실도 있었으며 희망적인 징후로 해석할 수 있는 사실도 있었 다.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소련정부는 여전히 대미관계를 개선하 고 이해를 함께 하는 영역에서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아주 명확하게 밝 히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같은 태도는 보답받 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상황을 단순화시키고 싶지 않다. 그 당시 미국의 권력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 고 있었다. 카터는 강경론자들에게 어느 정도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모 습을 갖추어나가고 있던 카터 정권은 전반적으로 군비관리와 긴장완화 를 파탄시키겠다는 공약을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우익은 카터를 리버럴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그룹을 만들 어 그의 정권에 압력을 넣었다. 이들은 미 ㆍ 소관계에서의 어떠한 적극적 인 움직임에 대해서도 방해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카터가 우익쪽으로 기 울어지게 할 유인 (誘引) 을 만들어내려고 했디. ‘당면의 위기위원회’ 가 엘리트들의 강력한 지지와 권력중추와의 긴밀한 연결, 그리고 전체적으 토 ‘존경할 만한’ 외관을 갖취 거의 ‘막후 정부 (Shadow Government)’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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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설립됐다. 해묵은 매파 그룹의 움직임이 한층 활발해졌다.
- 왜 카터는 그러한 압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는가?
답: 카터 정권이 의연하게 긴장완화를 지지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압력을 이겨내고 의회와 국민여론의 마당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 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로 카터 자신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며 또한 확실한 공약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 둘째로 긴장완화에 반대하는 집단이 정권 내부에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와 제임스 술레진저 와 같은 상당히 저명한 대표를 파견하고 있었다는 것. 세째로 카터가 모든 집단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 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카터 정권 초기의 외교정책에 대한 접근방법은 긴장완화 추 진과 긴장완화 반대의 양쪽 입장 가운데 중요한 요소를 그의 정책에 포 함시키려는 시도들로 특징지워졌다. 이러한 희미한 태도는 미 ㆍ 소관제 를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카터에게는 사실상 일관된 외교정책이 없다 는 당연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일단 그러한 인상을 주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지지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당신은 소련이 카터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말했는데.
답: 대통령 취임에 앞서 카터는 이미 소련정부와의 접촉통로를 만들 어 놓고 있었다. 카터는 분명 전임 대통령의 잔여임기 중이나 자신의 대통령 취임 직후 수주일 내에 소련에 의해 ‘시험받는다’ 는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대단히 근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소련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뭏든 카터는 소련으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회답을 받았다. ‘우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신임 대통령을 시험할 의도는 없다. 우리는 대미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할 용의가 있다’ 는 취지의 회답이었다. 실 제 소련은 정권이행 기간 중에 미 ㆍ 소관계의 중요한 분야에서 적어도 곤 란을 조성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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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캠페인을 기점으로 해서
- 그리고 1977년 1월 취임식 바로 전날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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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la) 에서 연설했다.
답: 그렇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긴장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엄 청난 노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면서 그간 죽적돼온 진장완화의 재산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호소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의 새 로운 정권과 함께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일보를 전진시킬 용 의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SALT II 조약을 조속히 체결하고 이어 SALT III 협상을 빨리 개시할 것을 촉구하고 나아가 핵확산 방지를 위한 새로 운 조치를 실현하며 비엔나에서의 중부유럽군비병력 상호감축협상에서 합의에 이르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또한 미국에서 격렬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던
소련의 군사 독트린과 개념에 관련해 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명확히 했다. 소련정부는 관계개선의 길이 열 려 있다는 것, 긴장완화를 계속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있었 다. 그러나 수주일 뒤에 나온 워싱턴으로부터의 반응은 이러한 소련측 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 인권 캠페인을 말하는 것 같은데, 반체제인사 사하로프에게 백악 관의 편지를 써서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는 따위와 같은 방법에 대해 서는 미국내에서도 『타임』지와 제임스 레스턴 (James Reston), 그밖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답: 그러나 편지가 온 것은 사실이며 그후 사건을 보면 이것을 특수한 사례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돌연한 ‘인권’ 캠페인 과 전후해서 대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정치적 입장이 갑자기 변했다. 사이러스 밴스 (Cyrus Vance) 국무장관이 1977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제시한 SALT II 에 관한 제안은 1974 년의 블라디보스톡 합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 그것은 소련에게 충격이었는가?
답: 사태가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조짐은 파악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용이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의 인상으로는 밴스 일행과 회담에 임했던 우리나라 대표들이 밴스의 모스크바 체재 최후 순간까지 미국측이 결국 원가 좀더 현실적인 제안 을, 적어도 다음번 협상을 위한 예비로서, 제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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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스가 최초의 일괄제안 이의에는 아무것도 제안할 거리를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과, 그처럼 노골적으로, 그처럼 공공연하게 미국본위의 이 익만을 획득하려고 하는 제안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해서 모스크바까 지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소련 대표단은 믿기 어려웠다. 밴스 장관 의 첫번째 모스크바 방문이 실패했음은 곧 분명해졌다.
- 키신저였더라면 그처럼 성공할 가망이 없는 임무에 착수했을 것 으로 생각하는가?
답: 밴스도 그러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밴스 개인은 정치가, 외교관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솔직이 말해 어떻게 해 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키신저에 대해 말 한다면, 만약 당신이 몇년 전에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면 나는 ‘아 니’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키신저의 최근 연설아나 논설에 비추어볼 때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팬리 키신저는 맨스, 브르제진스키, 카터 정권 수뇌의 절반 이상 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륵델러가 (家) 의 거대한 금력 (金力) 에 힘입어 이름을 날렸다.
답: 록펠러 가문, 또는 의교관계평의회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또는 3극위원회 (Trilateral Commission) 와 같이, 록펠러 가문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단체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이 참여하 지 않았던 미국 행정부는 지난 몇십 년 동안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록펠러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록펠러가는 우리가 보 건대 대외정책체제의 봉사를 받고 있는 미국 기업엘리트 가운데에서 가 장 눈에 띄고 선전되고 있는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카터 정권이 준비한 소련과의 첫번째 회담은 실패로 끝나 고 말았군.
답: 그렇다. 실패였다. 그 회담은 소련에 대단히 실망적인 인상을 주 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회담의 결과 새 정권의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방법과 장래의 정책에 대해서 우려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 다. 카터 대통령 취임 후 처음 몇 개월 만에 미국의 정책에는 과연 지속 성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전임 정권은 소련과 많은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카터는 이들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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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새 정권은 이 모든 협정을 파기하고 처음서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머잖아 두 나라 관계에 일종의 순환패턴 이 표면화될 것임이 분명해졌다.
- 그러나 솔직이 말해서 서방측에서는 그와 반대로 뜨거운 전술과 차가운 전술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같은 전술이야말로 소련이 외교 정책을 수항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느끼고 있는데.
답: 소련의 외교정책은 몇 년간에 걸쳐 매우 높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서방측마저도 부인하기 어려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정책, 특히 카터 정권하에서의 정책에 관해서는 기록을 보면 좋다. 1977년은 출발이 좋지 않았으나 늦은 봄과 여름에 걸쳐 사태는 조금 개선되었고 10월에는 SALT II 와 중동에 대한 합의를 이를 수 있었다. 후자는 며 칠 뒤 사실상 파기되었고 1978년들어 사태는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 었다. 이번에는 브르제진스키의 방중 (해中) 과 5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NATO회의로 말미암아 사태는 한층 심각하게 되었다.
여름이 되면서 미 ㆍ 소관계는 70년대를 통해 어쩌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렸다.
- 그렇다면 긴장완화는 카터 정권 기간중에 침몰되었단 말인가?
답: 당신의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의견으로는 긴장완 화는 죽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수 년간, 특히 1977년 이후 미 ㆍ 소 관계가 점점 안정성을 잃어온 것은 사실이다. 사태가 한번 순환할 때마 다 앞의 순환보다 긴장완화를 더욱 손상시켰다. 두 나라 관계를 역시 대단히 손상시킨 것은 매스컴뿐만 아니라 공식발언이나 선전에서도 반 소 (反{problem}) 어조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되어 갔다는 점이다. 카터와 레이건 정권은 이러한 캠페인을 부채질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를 연계시켜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리, 즉 내용과 분위기를 연결하는 것을 무시했다.
이같은 연계에 대해서는 키신저가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내용이 없이 긴장완화의 분위기만을 얻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의욕과 적의 의 분위기 속에서는 긴장완화의 내용도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라고 1974년에 경고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현재 미 ㆍ 소관계에는 긴장완화의 분위기도 없어졌고 내용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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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미 말한 대로 이같은 관계악화의 진행양상은 특히 카터 정권하 에서 고저가 있었다. 사태가 개선되지는 않을까 하고 희망을 가졌던 시 기도 있었다.
- 비엔나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답: 그렇다. SALT II 협정은 드디어 1979년 6월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서 조인되었다. 그것은 실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군비관 리의 일보 전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군비관리 협상과 전반적인 정 치적 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과였다. 더구나 엄청난 곤 란을 극복하고 얻은 성과였다.
그러나 조약은 비준을 필요로 하였으며, 비준을 둘러싸고 워싱턴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질 것임은 분명했다. 그후의 사태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조약이 어떻게 해서 쓸모없이 돼버렸는지 를 가르쳐줄 역사적 사례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좋은 예라고 말하 겠 다.
- SALT는 아직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
답: 나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현재로사는 SALT의 협상과정 전체의 앞날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협상의 진전이 1개 월 늦어질 때마다, 특히 여기에 수반하는 군사예산이 일관해서 늘어나 고 새로운 무기체계가 도입되면, 다시금 중대한 위험이 발생한다. 그러 나 카터 대통령의 말로 돌아가서, 카터가 1976년에 군비관리와 군사지 출 삭감의 이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최종목표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 을 전면적으로 배제하겠다고까지 말했을 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대통령이 자신의 정권에 몇 명의 강력한 군비관리추진파를 포함 시킨 성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기회에 전혀 정반대의 견해 를 표명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진지했음은 분명하다. 카터의 성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적 지지를 공고히 하여 대통령 재선을 확고히 하 고자 했던 욕망이었다. 1976년의 카터와 1980년의 카터를 비교하면 지 옥에의 길은 선의에 의해 닦여진다는 널리 알려진 속담을 상기하지 않 을 수 없다.
요컨대 미 ㆍ 소관계의 전체적인 구조의 침식이 추진되었고, 그것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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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달했던{problem}1980년 초에는 간장완화로부터 냉전으로의 공공연한 전환 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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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소론의 2대 조류
- 그러나 이같은 침식과정은 당신 자신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카터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답: 그렇다. 미 ㆍ 소관계가 건설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그 이전에 좁 아지기 시작했다. 최초로 상실된 연결고리는 통상이었다. 통상이 전면 적으로 증지되었다든가, 정세가 궁극적으로 개선될 희망이 전혀 없었다 는 의미는 아니지만, 1972-73년에는 통상이 상호협력의 매우 유망한 분 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큰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후 잭슨 ㆍ 배니크 (Jackson ㆍ Vanik) 1974년 통상법 수정조항이 의 희를 통과했다. 이것이 통상협정을 사문화시킴으로써 정세가 악화되 었다.
- 키신저의 주장에 따르면 제슨 ㆍ 배니크 수정조항은 소련 정부가 유 태인 이민들에게 갑자기 출국세 (出國脫) 를 부과한 데 대한 명백한 반 발이었다는 것이다. 소련정부의 이같은 결정은 닉슨과 키신저를 다같 이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것 같다.
답: 내가 기억하는 한, 잭슨 ㆍ 배니크 수정조항이 의희를 통과했을 때 에는 출국세 분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의회 의 결정과 아무련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출국세 그 자체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해외이주의 증가라는 새 로운 사태에 수반되어 발생한 여러가지 문제의 하나를 해결하려는 조치 였다. 그 문제란 국가가 '국민의 교육에 거액의 돈을 지붙했는데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는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 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철저히 토의된 끝에 결국 그러한 경비는 회 수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뭏든 통상이라는 연결고리가 매우 약화되자 다음에는 유럽이라는 연결고리의 차례였다. 1975년 이전에는 유럽의 안전보장과 협력을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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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문제에 대한 미국측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 으나 건설적이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미국의 입장은 크게 바뀌었다.
미국은 유럽에서의 화해의 과정을 실제로 파괴 (sabotage) 시키려고 애 쓰기 시작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베오그 라드와 그 뒤 마드리드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 재검토회의에서 매우 강 렬하게 표면화되었기 때문에 서유럽 등맹제국의 일부에서까지 약간의 분노를 야기시켰다. 미국의 대표단이 인권문제에 집중한 것은 다른 중 요한 문제에서 미국이 건설적인 입장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은폐하는 편리한 연막이었다.
유럽의 다음 차례는 중등이었다. 1977년 10월 안드레이 그로미코 (Andrei Gromyko) 와 사이런스 밴스가 중동문제에 있어서 공통의 접근방법의 원칙에 대한 공동문서를 공표했다. 이것은 갖가지 곤란을 극복하는 장 기간에 걸친 작업과 양측의 견해를 접근시키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의 결과 얻어진 매우 소중한 성과였다. 그러나 몇일 후 미국은 중동문제 의 해결책을 발견하기 위해 소련과 협력한다는 이 약속을 깨뜨렸다.
- 미국은 왜 공동보조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부 대통령보좌관들이 그러한 접근방법 은 카터정권과 유태인 사회의 유력자들 간의 관계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 라는 우려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카터정권은 미 ㆍ 소관계 로부터 하나의 연결고리, 즉 가장 위험한 지역분쟁 가운데 하나를 해결 하기 위한 공동노력이라는 연결고리를 제거해 버리고 말았다. 이 연결 고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의 분쟁해결에 성 공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차츰 도착한 곳에는 마침내 단 하나의 가장 큰 연결고리밖에 남지 않았다. 군비관리, 즉 군비경쟁을 억제하기 위한 공등 노력이라는 연결고리이다. 이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로서 핵전쟁의 방지라는 미 ㆍ 소관계의 가장 증대한 문제와 직접 결부돼 있 다.
그러나 그밖의 분야에서 사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 연결고리도 매 우 취약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고리에 매달리기에 이른 상태처럼 미 ㆍ 소관계는 기의 전적으로 SALT 에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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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되었다. 더구나 SALT 와 군비관리에 부하되는 압력을 경감시킬 방 법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 현재 정치적으로 고립되어버린 SALT 를 포함한 군비관리 문제가 이전보다 훨씬 취약해지고 말았다는 뜻인가?
답: 그렇다. 그러나 만약 사태가 순조롭게 진전되어 SALT II 가 비준 되고 미소 양측이 의무를 이행하게 되면 손상된 연결고리가 점차 회복 될 수 있다고 나는 기대했고 그밖의 많은 사람들도 똑같은 기대를 갖고 있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만약 다시 미 ㆍ 소관계를 정상화시킬 때가 오면, 나는 그 때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오리라고 믿는 바이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군비경쟁의 억제는 앞으로도 당연히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밖의 관계도 경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들 관계 그 자체가 중요 하거니와 또한 이들 관계를 경 시하면 군비관리 자체에서도 어떠한 진전 을 이룩하기가 될씬 어렵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 몇년 간 전혀 블필요하게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 체된 군비관리협상을 촉진하는 것은 긴장완화를 전체적으로 강화함에 있어서 주요한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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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론보다 대화를
- 바꿔 말해서 당신은 링케이지 (linkage, 연계른) 를 옳다고 생각하는 가?
답: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그렇지만 당신의 견해는 과거 키신저의 연계론 개념과 어떻게 다 른가? 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거나 아프리 카 정책을 수정할 때에 비로소 군비제한협상에서 진전이 있을 수 있 다는 레이건의 주장과 어떤 점에사 다른가?
답: 미 ㆍ 소관계의 모든 분야가 어떤 형태로든 상호연결되어 있고 한 분야에서의 관제개선이 상호신뢰를 강화하고 전반적 분위기를 개선하 며, 그것이 또한 그밖의 분야의 개선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아두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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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지 못한다. 반대로 한 분야의 관계 악화는 다른 분야의 정세에 영 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이러한 상호연계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 니라, 이 연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이 점에서는 명확한 우선순위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 ㆍ 소관계에서 군비관리만큼 중요한 분야는 없다. 따라서 만약 진정으로 전쟁방지와 군비경쟁의 중지를 원한다면, 일부 지역적인 문제에서 양측이 대립하고 있다는 이유로 군비관리에 제 동을 걸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전제조건으로 서, 때로는 더욱 어려운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은 확실히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격이다. 따라서 링케이지의 사고방식은 상호연계를 자극하여 가장 사활적인 분야를 포 함한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악화시키게끔 작용하자는 것이다.
- 링케이지의 대안은 두엇인가?
답: 최소한의 대안으로서 가능한 어떤 분야에서든 관계개선에 노력 하는 것, 군비관리와 군축은 다른 분야에서 어떠한 곤란이 있더라도 계 속해서 진전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될 분야로서 분리시키는 일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SALT I 은 이상적인 분위기 아래서 성립되는 것 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정책의 어느 측면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소련에서는 미국의 정책을 블쾌하게 여길 이유 가 너무나 많다. 링케이지의 논리에 따른다면 쌍방은 대화를 중지하든 가, 대화를 분노에 찬 비난의 응수로 제한하든가, 각각의 불만의 원인 이 된 문제가 저절로 해소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저절로 해소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과거 3년 동안 보아온 일이지만 소련과 미국 간의 전반적인 정치 적 분위기가 악화되면 군비관리는 큰 장애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 서 우리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개선하고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그 결과 평화가 강화되고 양국관계의 주요 분야, 즉 군비관리와 군축에서의 진 전이 용이해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악된다.
- 닉슨 대통령은 소련지도자들과 매번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제도를 발족시켰다. 이러한 발전 (방법) 은 폐지되고 말았다.
답: 그렇다. 두 나라 지도자가 회담한다는 확립된 관행은 거의 중지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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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이같은 정상회담은 지극히 중요하긴 하지만 정치적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서 정상회담이 열리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비동맹회의가 끝난 뒤 네루 (Nehru), 수카르노 (Sukarno), 엔크루마 (Nkrumah), 케이터 (Keita) 등이 사절단으 로서 모스크바와 워싱턴에 파견되어, 초대국간에 그러한 정기적인 회 담을 열도록 요청한 적이 있다.
답: 확실히 정상회담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수단이 강력하 면 할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그만큼 .세심한 주의와 면밀성이 요구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본래 의도한 것과는 달리 나타날지 모른다. 정상회담은 조잡하게 또는 졸렬하게 취급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 능성이 있다. 정상회담이 내용이 없는 정기행사로 되어버리면 기존의 관계구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염려가 있다. 우리는 확실한 내용을 가 진 정상희담을 찬성한다.
- 닉슨과 키신저 두 사람 모두 그들의 회고록에서 똑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키신저회고록을 읽고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답: 내가 받은 인상은 대체로 긍정반 (半) 부정반 (半) 이다. 미국을 연 구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필독서이다. 저자는 종종 감명을 추며 때로는 재기발랄한 면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매우 유명하고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인 만큼 사실의 왜곡, 특히 소련의 외교정책에 대한 왜곡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기록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맞을 안겨준다. 자신의 업적을 최근의 정치적 유행에 맞추려는 욕망에서 그같은 수정을 시도하 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의 강경한 반소 자세를 최근의 역사에 투영시 킨 듯이 보이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자기자신을 완전한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묘 사하고 있다.
답: 글쎄, 저자를 격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회상록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키신저의 경우, 성공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점이다. 나로서는 키신저가 긴장완화를 실현한 데 대해 변명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키신저의 태도로 인해 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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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담은 러시아를 얼마나 기만적이고 교묘하게 다루었으며 어떻게 미국측 이 일방적인 이익을 얻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만약 이것 이 그의 원칙적인 행등방식이었다면 그는 미 ㆍ 소관계에서 진정으로 가 치있는 성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키신저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키신저의 현실주의적 경향과, 상호이익이 될 분야를 감지하고 발 견해내어 그러한 상호이익의 범위내에서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 책을 모색하는 능력 덕택이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1974년에 ‘미국과 소련 간의 건설적인 관계 없이는 평화적인 국제질서는 있을 수 없다’ 고 주장한 정치가 키신저에게서, 그 몇년 뒤 회고록 가운데서 70년대 전반에 양국관계에서 달성된 성과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려고 한 정치인 키신저에게서보다 깊은 감명을 받 는다.
그리고 나는 군사력은 더이상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화되지 않는다는 점과 ‘결정적인 군사우위를 얻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비록 가능할지라도 정치적으로는 무리한 일이다. 어느쪽도 핵의 균형이 크게 바뀌는 것을 수동적으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점을 논 증한 키신저 편이, SALT II 협정의 비준 전제조건으로서 새로운 군비 경쟁이 필요하다는 정책결정에 힘을 빌려주가나 레이건과 헤이그가 소 련에 연약하다고 비난하는 키신저보다도, 정치가로서나 학자로서나 훨 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 키신저의 회고록 속에서 미 ㆍ 소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부 정확한 점이 눈에 띄는가?
답: 키신저는 당초 정상회담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삐했다는 것이 나 의 인상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고록 가운데 정상회담에 관한 기술의 신 뢰성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1972년의 정상회담에 임한 미국대표단의 무드는 키신저가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시니컬하다거나 자신에 찬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미국측이 왔을 때 그들은 2주일 전의 하노이 폭격과 하이동 기뢰봉쇄에 소련이 어떤 반 응을 보일 것인가, 정상회담이 결렬되자는 않을까하고 매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디. 정상회담이 결렬되었더라면 국내 흔란 가운데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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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앞둔 해의 닉슨 정권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지도부가 미국의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지금은 ‘눈에 는 눈을’ 이라는 보복의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 양국 관계의 과감한 타개를 꾀해야할 때라는 점을 책임감과 용기를 갖고 인식하고 있음이 분 명해지자 미국측은 매우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대표단 가운데 한 사람이 크레믈린 궁전의 그라노비타야 (Granovitaya) 실 (室) 에서 베풀어진 최초의 환영연에서 역사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명상하듯이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닉슨 정권의 완고한 사람들조차 중대 한 역사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미래에 큰 희망을 품고 있었 다. 그것은 주목할 만하고. 매우
시사적인 감정이었으나 회고록에서는 거의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 키신저의 접근방법에 비해 카터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보았는가?
답: 비록 그의 시도가 때로 부적절하고 전통적인 세력균형론의 제약 을 받곤 했지만, 키신저는 기본적으로 냉전의 패턴을 뛰어넘으려고 했 다. 카터 정권에는 자신들의 정책과 키신저의 정책을 구별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으나 결국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 패하고 말았다.
카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전체상을 규정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 다. 최초에는 남북관계와 군비관리, 미국 외교정책의 새로운 우선목표 에 대해 일부 사고방식의 혁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많은 동요와 곡절을 겪은 끝에 1980년에는 다시 주워맞춘 냉전 패턴으로 되돌아가, 최초의 역사로부터 얻은 모든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았다. 여기서 다시 미국 외교정책이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참다운 과제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국제정세의 새로운 현살 과, 미국의 정책형성을 둘러싼 내외상황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 냐는 과제이다. 이 적응의 과정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이 때로는 지체되 거나 방해받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 흐름은 역전시킬 수 없으며 다시 표면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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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와 브르제진스키
- 키신저와 브르제진스키를 비교할 때 외교의 통괄책임자로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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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상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두 사람의 지적, 정치적 능력에 큰 차이가 있음을 차치하고라도 스타일 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요한 차이는 키신저가 무엇보다도 후선 리얼폴리틱 (현실정치) 파의 참다운 신봉자로서 정책의 실제적 요소밖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서의 현실주의자인 데 반해, 브르제진스키는 이데올로그로서, 그의 견해 는 선험적인 이데올로기 체계로부터 비롯되는 관념과 접근방법에 의해 매우 농도짙게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레이건 정권에는 이러한 사람 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비록 브르제진스키가 교육정도는 높지만.
- 국러한 차이는 미 ㆍ 소관계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답: 그 하나는, 키신저의 견해에 따르면, 소련은 국제무대에서의 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데 상황에 따라 타협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될 때도 있고, 보다 전통적인 라이벌 또는 동반자로까지 간주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브르제진스키에 따르면, 소련은 무엇보다도 ‘비합법적인’ 사희이 며, 소련 국내에서 근본적인 내부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소련과 정 상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차이는 미국정치사 상의 두 가지 유력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키신저와 브르제진스키라는 두 인물간의 단순한 개인적 차이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키 신저는 동서관제에 훨씬 더 전념했던 것처럼 보이며, 반면 브 르제진스키에 대해서는 서서 (西西) 문제와 남북문제에 집중하지 않았 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답: 맞는 얘기다. 서서관계와 남북관제에 관심의 촛점을 옮기는 것은 3극주의 (북미, 서구, 일본의 3자 협력정책) 의 구조 속에서 브르제진스키 가애착 을보였 던구상 의하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세련된 수사로 은폐 되어 있었으나 그 참된 본질은 명백했다. 참된 본질이란 동서관계의 긴 장완화로의 전진을 동결시키고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로 부터 후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결과 동서관계는 말 할 나위도 없고 서서관계와 남북관제에서도 이러한 구상으로부터 아무 런 성과를 거두치 못했다.
카터 정권하에서는 남북관제에서 실질적인 진전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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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는 개발도상국들에 아첨을 떨었으나 그것도 점차 전통적인 군사 개입주의의 사고방식에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동시에 카터 정권은 동서관계의 우선 순위를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무 위로 끝난 뒤 이 관계를 다시 한번 외교정책 과제의 최우선 순위로 올 려 놓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카터 행정부는 이를 긴장완화의 방향으 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결의 방향에서 이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구조 전체를 왜곡하고 말았다. 이는 마치 자석 이 자성 (磁性) 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는 격이었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결 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서구와 일본 및 기타 지역과 미국 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경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또한 미국을 포함해서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자국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대외관계와 체제를 작성할 권리를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밖의 요인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 지라도 동서관계를 우선순위 리스트의 최하위로 끌어내리면 반드시 엄 청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동서관계에는 해결하지 않으 면 안될 매우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선호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분명하게 서로 묶여있기 때문에 양측은 상호관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 면 안된다. 오늘날 서서관계와 남북문제를 포함한 국제정세의 주요한 문제들은 이같은 동서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이둘 문제의 향 배는 아직도 양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을 당연히 포함한 사회주의제국 과 자본주의제국 간의 관계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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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레이건의 대소정책
- 레이건 정권하에서 대소관계의 전망을 고려함에 있어서 ‘닉슨 모 델’ 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 닉슨은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반 공주의자였으나 긴장완화로의 방향전환을 실행한 것은 닉슨이었다.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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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권이 마찬가지의 정책전환을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답: 만약 대통령의 임기가 4년 이상 지속된다면 그러한 전환이 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평화공존과 긴장완화를 대신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없으며 미국 지도자의 현 정책은 실현성이 결여 되어 있고 객관적인 조건에서 볼 때 무책임한 게임을 매우 오랫동안 계 속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며, 이 점에서 보아도 레이 건 정권의 정책전환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러한 흐름은 냉정을 되찾아 현실로 되돌아가지 않 을 수 없다. 그러나 레이건 정권의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 정책을 바꾸 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닉슨의 경우는 15년 내 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4년 (미 대통령선거의 해) 까지 남은 시간이 충분하다는 확신은 없다.
닉슨과의 유사성이라는 점으로 말머리를 돌리면, 그것이 매우 설득력 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긴 하 지만 역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정세와는 매우 다르다. 닉슨은 냉 전정책의 파산이 매우 명백한 형태로 드러났을 때 정권을 잡았다. 미국 은 예산의 우선순위를 수정할 필요성 - 특히 사회지출의 증액과 군사 비의 삭감 - 을 이해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상황변화를 이 해하고 있었다. 최근들어 미국민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 게 만들고 안보의 유일한 방법으로써 다시 냉전과 군비경쟁을 설득시키 려는 시도들이 강력히 전개되고 있다.
이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 할 것이며 더구나 미국의 이익과 안녕은 이같은 시도로 인해 심각한 손 상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레이건 정권의 정책이 수많은 상처와 좌절을 겪기 전에 이 모든 사실을 명백히 납득하게 될런지는 참으로 예 측하기 어렵다. 사실 그러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에 이 두 대통령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 그것은 물론 미묘한 문제이긴 하다.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이미 외교문제를 포함해 상당한 정책경험을 쌓고 있었다. 레이건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다. 닉슨은 외교정책에서 큰 일을 하고자 열망한 자극 적인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의 성격이 어느 정도나 적극적인지는 알 수 없다. 닉슨은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주 출신이지만 닉슨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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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견해는 지방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는 더이상 깊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
두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닉슨의 주변에는 범용한 사람과 유능한 사람, 지방의 인물과 중앙 체제에 속하는 사람, 신인과 베테랑, 보수파와 은건파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들의 대부분은 실용주의자들이었다.
레이건의 주변은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이며 정치 분야에서는 지방 출 신의 초심자이고 매우 보수적이다. 특히 준각료 레벨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과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다수는 실용주 의자가 아니라 이데올로그이다.
덧붙여 말하면 이 정권에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일 으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종전의 정권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생각 된다.
- 레이건 외교정책의 주요 목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모든 증거로 관단해보건대 마국이 세계에서 극히 예외적인 지위 를 차지하고 있던 저 낡은 시대를 다시 한번 되찾자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목표를, 무엇보다도 우선 군사력을 증강시켜 이 군사 력을 외교정책에서 좀더 사용가능한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달성하려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해 군사적 우위를 실현하고 소련 등 사회주의제국에 냉 전정책을 선언하는 노선을 택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 다. 레이건 정권은 대소관계를 악화시켜 세계적인 반소성전 (反蘇聖戰) 을 개시하는 것이 세계에서의 미국의 입장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것 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 이 계획은 실패할 운명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 점에 대해서 최종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어떻게 보아도 그러한 정책이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과 위신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기는 거의 어려울 것이다.
소련과 미국,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NATO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군사 적 균형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현재의 무기 수량이나 질적인 특징으로 볼 때 군사력의 균형을 크게 한쪽 편에 유리하게 변화시키기는 극히 어 렵다. 결국 그러한 목표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쪽이 균형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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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위협하면 상대방도 필요한 대항조치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이며 레이건 정권은 이러한 군사문제를 둘러싸고 온갖 소란을 벌이 기 시작했으나 이 현실을 뒤흔들 수 있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마찬가자로 핵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며, 핵전쟁 에서의 승리를 계산하는 것은 미친 짓이며 한정핵전쟁이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가 위험한 환상이라는 현대의 진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진실을 반박하려는 시도로써 몇조 달러를 군비증강에 지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 사력을 사용해서 안전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미국의 기회를 확 대시키겠다는 꿈은 앞으로도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실로 이같은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레이건의 정책목표와 실제의 결과들 사 이에 괴리가 생겼던 것이며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 반핵운동을 뜻하는가?
답: 그렇다. 레이건이 이같은 진로를 택한 결과 수많은 국민이 전쟁 과 평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유럽 사람 들, 그리고 이제는 미국의 대중도 핵의 위협이라는 존재와 그 위협의 증 대를 전례없이 민감하게 느꼈다. 대서양의 양쪽에서 정치적, 심리적 풍 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군비증강의 격화와 대결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고 조되었다.
- 레이건 정권은 이 운동을 소련의 선전공작의 탓으로 돌렸다.
답: 사실 워싱턴당국은 그같은 유치한 중상으로 이 운동을 짓밟아 버 리려고 애썼다. 비록 그러한 중상은 소련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여도 좋 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전세계의 수십 개국에서 그만큼 광범한 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찬사는 과분한 것이며 나는 공산당원이자 소련시민으로서 그러한 찬사를 받는 것을 유 감으로까지 생각한다. 만약 이같은 반핵운동이 몇 가지 음모를 꾸미고 달 러를 좀더 많이 뿌리고 모략활동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가능하다면 이 분야에서는 미국측이 오히려 훨씬 경쟁력이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정세는 미국정부가 바라온 방향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그 유일한 이유는 이런 종류의 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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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하고 이 지지는 돈으로 매수하거나 사기수법으로 획득할 수 없는것이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지성과 자기보존의 본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모스크바의 손’ 이라는 캠페인이 실질적인 인상을 주는 데 실패하고 만 이유였다.
오늘날 대중의 ‘위대한 교사’ 역할을 수행한 것은 레이건 정권 그 자체였음이 점점 명확히 드러나게 되었다.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린 것은 레이건 정권의 정책이며 수사 ({problem}辭) 이며 그말과 행동이었다.
그러나 레이건 정권이 ‘소련의 위협’ 이라는 신화를 이끌어내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미국정부의 정책으로부터 빚어지는 군비경쟁과 국제긴장의 격화로 인해 핵의 파멸이 현실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는 미국의 유권자로부터 무제한의 군비경쟁과 냉전의 부활, 해외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저질러도 좋다는 위임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후의 사건을 보면 미국 국민의 대부분이정부에게 그러한 위임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해졌다. 레이건 정권의 외교정 책이 항의와 불만의 높은 파도에 직면하고 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있는 것이다.
1960년대의 반전운동은 주로 학생, 지식인, 진보파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의 반핵운동의 구성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원도 공화당원도, 진보파도 보수파도, 노조지도자도 기업가도, 그리고 의사, 변호사, 성직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
또한 긴장완화를 파괴하고 냉전으로 복귀하며 소련 등 사회주의제국에 적대하는 ‘성전 (聖戰)’ 으로 나아가는 진로를 택하면, 미국은 동맹제국을 결속시켜 미국의 정책에 맹목적으로 추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오류임이 입증되었다. 긴장완화, 군축, 통상을 포함한 대소관계라는 문제는 그같은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에 새로운 불화의 원천을 마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레이건의 정책은미국과 개발도상국의 관계에도 아무런 개선을 가져오지 않았다.
미국은 제 3 세계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실행했던 개입, 착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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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이라는 정책의 ‘작물’ 을, 1970년대에 거둬들이는 입장에 빠졌다. 지금 워싱턴은 또다시 ‘파종’ 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번의 ‘작물’ 은 중남미, 아랍 제계, 기타 지역에서 훨씬 빨리 성장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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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 청사진
- 1982년 초가 되자 레이건 정권내에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비틀거리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외교정책을 수정하려는 시도도어느 정도 있었고 알렌과 헤이그가 사임하고, 언어구사의 태도도 바뀌
었다.
답: 확실히 정치적 후퇴는 워싱턴당국에 영향을 미쳤다. 소련으로서는 가령 레이건 정권이 때늦은 감은 있지만, 전략무기제한 ㆍ 삭감회담을재개키로 결정했을 때 이를 환영한 바와 같이, 레이건 정권이 타당한 조치를 취하면 언제나 이를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레이건 정권이 국민을 진정시키고 잘못된 생각을 갖도록 하는 정치조작 이상의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구나 평화적인 움직임을 보일때마다, 레이건 정권의 정책이 불변임을 확인하고 레이건 정권이 공격적인 반소정책을 버릴 의사가 없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행동이 항상뒤따르고 있다.
가령 레이건 대통령은 1982년 5월 2일 일리노이주 유레카(Eureka)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전략무기제한 ㆍ 삭감협상을 재개하는 데 동의한다고언명하고 나서는 영국 의희와 유엔총희에서는 냉전의 정신으로 연설했다. 대통령이 서명한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각서와 1984-88회계년도국방성 지침의 내용도 의도적으로 공표되었다.
『뉴욕 타임즈』 는 이 지침에 대해서「죽음에 이르는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논평했다. 이것들은 극도로 호전적인 문서이다. 실제 무제한의 파괴활등을 수반하는 경제 ㆍ 기술전쟁에서부터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까지구사하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소련 등 사회주의제국과 전면 대결하기 위한 청사진이다.
- 국방성 지침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았는가?
답: 이 문서는 레이건 정권의 대다수 멤버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았다. 즉 무분별하고 오만하며 경박하고 사려가 결여되어 있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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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는 명백한 ‘속임수’ 가 수없이 포함되어 있다. 퇴임을 앞둔 합참의장데이비드 존스 (David Jones) 장군조차 지침에 나타난 계획의 일부를 실행하고자 한다면 밑빠진 독에 돈붓기 식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을수 없을 정도이 다.
이와 동시에 이 ‘지침’ 은 그밖의 나라들을 위협하고 자신의 국가와동맹국의 ‘사기를 북돋워’ 주려고 하는 허장성세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문서의 작성자들은 분명히 자기들 자신의 선전의 희생자가 되어 자국의힘과, 그밖의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판단을 그르치고있다.
- 이 ‘지침’ 은 주로 국방성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성권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답: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나타난 태도가 국방성의 ‘독립성’ 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사실은 현정권 지도자들의 어떤 충동적 본능을 반영하고 있다. 본에서 열렸던 1982년의 NATO회의 폐막연설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우선 각국 수뇌들에게 소련과 군비제한을 협상하겠다고 확약한 직후에 정치적으로 서방측은 아직 ‘소련과 전쟁상태에 있다’ 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것도 전혀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발언에서 우리는 미국의 정책과 현실 사이에 또다른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워싱턴당국의 인간들은 군비제한협상의 성공과핵전쟁의 방지를 위해서는 사회제도가 상이한 국가들, 그중에서도 우선초대국인미 ㆍ 소 양국간에 정상적인 관계, 평화공존의 관계, 긴장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거나 굳이 상기하고 싶어하지 않는것이다. 한편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무차별적인 ‘정차전쟁’ 을 걸고군비경쟁에 박차를 가하며 소련에 대한 증오와 불신감을 부채질하면서평화의 유지와 협상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미국외교의 원로인 조지 케난 (George Kennan) 교수는 최근 미국정부와 매스컴에서 행한 연설과 글을 통해 오늘날 지배적인 소련관은 극단적이고 주관적이며 양식을 갖고 현실로부터 배우는 것과 거리가 멀다고주장하고, 이러한 소련관은 정치행동의 기초로서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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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국의 우익 과격파가 소련을 증오하고 지체없이 없애버리고 싶어한는 것에 놀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체없이 말살하는것을 목표로 지침을 작성한다는 것은 우스광스러운 짓이 다. 이 지침을작성한 자들은 이러한 일이 과거에도 영불협상국과 추축국 쌍방에 의해서, 그리고 냉전시대에는 미국 자신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언제나 대실패로 끝났음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확룰이 훨씬 더 적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국의 현행 정책이 안고 있는 위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위험이란 평화의 대의 (大義) 에 대한,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대한 위험이다. 레이건 정권이 자신의 적이라고 보는 자들, 나아가 이제는 미국의 등맹국과 대중조차도 결코 이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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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으로부터
- 미국의 현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답: 가까운 장래에 대해서 말하자면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미국의 정책이 어느만큼 좋은가는 나빠지는 것을 어느 선에서 막느냐에달려 있으며, 어느정도 안전한가 - 우리에게 있어서 뿐만아니라 미국자신과 그 동맹국에 있어서도 - 는 위험스럽게 되는 것을 어느 선에서 막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을 막고 허용하지 않는 것은 경체적 ㆍ 정치적 현실이며 다른 나라들의 정책이며 미국 국민의 상식이며 인류의 생존을추구하는 노력이 다.
이러한 요인들이 충분히 강력하게 작용하여 그 결과 미극의 정책이, 미 ㆍ 소간에는 명백한 모순뿐만 아니라 평화와 생존이라는 중요하고 사활적인 공통의 이익도 존재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되기를 바란다. 이들 공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지 협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며 관계의 전반적 개선이 불가결하다.
- 헤젠은 일찌기 사람은 결코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다 라고썼다. 이 금언은 미 ㆍ 소관계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답: 헤겔은 실로 풍부한 사상을 물려주었는데 철학에 대한 나의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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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감스럽게도 불완전한 부분이 많다. 나는 당신이 든 금언과는 반대의 것, 즉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로부터 배우는 이성 (捚性)의 힘을 강조한 헤겔의 다른 생각도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저 위대한 변증법 학자가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은 방향에서 생각을 한 것도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생각 모두 인류와 역사의 복잡한 관계의 한즉면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두 논점 모두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전혀 학습 능력이 없었더라면 도대체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유능하고 부지런한 생도로서역사의 교훈을 철저히 숙지했더라면 역사는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영구평화와 완전한 안전, 그리고 절대적 정의의 왕국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와 인류는 이 양극단 사이의 어느 곳인가에서 움직이고있다. 미 ㆍ 소관계에 대해서 분명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 두 나라는 지금까지 살아남아 왔는데 실로 이것은 이성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의 증명이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높다. 그것은 무엇보다도역사의 교훈이 완전히 소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는미 ㆍ 소관계에 많은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나 역시 지금 돌이켜보면우리는 70년대를 기회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국 관계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말하자면 역사가 도대체 기억되고 있는지 실로 의구심을 갖게 할 정도이다.
- 레이건 정권은 역사로부터 을바른 교훈을 끌어낼 것인가?
답: 그 질문은 1984년에 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역사는 비록 중요하지만,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각각의 세대는 과거로부터는 해결의 열쇠를 얻지 못하는 새로운 곤란한 과제, 각세대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책임을 지고 있는 과제에 직면하지 않으면안된다.
우리 동세대의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임무는 역사적으로 보더라도전례가 없으며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여지는 전혀 없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물론 전쟁방지라는 문제이다.
제1 차세계대전을 목격하고 싸운 우리 부모세대는 비극적인 과오를범하고 역사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끌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 2차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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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발발을 허용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은 실로 비극이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종(種)으로서의 인류는, 또한 가장 큰 참화를 입은 나라들조차도 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만약 이같은 과오가 언젠가되풀이된다면 그때는 도대체 교훈을 배울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게 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는 실로 운명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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