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만 약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무기를 회담에 서의 ‘비법’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비법’ 이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경질파 같은 사건파 판련하여 소련 외 교정책의 추요 내용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평화공존, 군축, 국제협력이 소련 외교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어느 소련 관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즉, 서방세계는 체제를 바꾸든가 전쟁을 하든가 둘 중 택일을 해야 된다든가, 미 ㆍ 소간에 핵전쟁이 붙으면 인구의 ‘불 과’ 10% ‘만’ 희생될 것이라든가 등. 그러한 발언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소련 사람들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최고의
가치이며, 국가의 최우선 정책이 된다. 바로 여기에 미 ㆍ 소간의 주요 상이점이 있다. 이 상이점 이 오늘날의 중대한 세계문제에 대한 양국의 해결방식에 하나의 특징으로 작용한다. 지나간 세월은 그같은 상이점이 매우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저런 상이점들이 극복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늘날 미 ㆍ 소관계가 가까운 장래에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미국의 정책이 머지않아 보다 현실적인 것이 되리라는 가능성을 나는 배제하지 않는다. 결국 인생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교훈은 처음에는 쓰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워싱턴 당국이 지난 1~2년 사이에 경험한 두 가지 가장 당황스러웠던 일 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폴란드 사태였다. 어떤 미국인들은 폴란드 사태의 더할 수 없이 극적인 역전을 바랬다(내전상태나 소련군의 출현 등). 그 이유를 나는 알 수 있다. 독자들은 이 문제에 관 한 논의를 이 책에서 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미국인들을 당황케 했던 것은 우리나라 지도층의 교체였다.